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정유미 분)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홍보회사에 다녔다. 정대현(공유 분)과 만나 결혼해 딸 아영을 낳은 뒤에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지영은 가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명절날 시댁에서 시어머니를 ‘사부인’이라고 부르는 친정엄마가 됐다가, 한밤에 맥주캔을 따며 ‘지영이한테 잘하라’는 대현의 결혼 전 애인이 된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동명의 베스트셀러가 원작이다. 고(故) 노회찬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원작 도서를 선물하고,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읽었다고 밝히면서 주목을 모았다.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일본에선 3일 만에 아마존재팬 아시아문학 부문 1위에 올라 일본 내 ‘K문학’ 열풍을 이끌었다. 영화는 책의 인기를 업고 37개국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내가 나가서 오빠만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나 몰라.” “영호 구구단 가르치려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 지영은 다른 엄마들과 만난다. 그 자리에는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수학 문제를 풀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영호 엄마가 있다. ‘아이 책 읽어주려고 연기를 전공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보람 엄마도 있다. 모두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고학력 여성들이다.
이들의 노동시장 참여와 이탈은 임금이론의 ‘유보임금(reservation wage)’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유보임금이란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여가 시간에 X원의 가치를 부여할 때 시간당 임금이 X원보다 크지 않으면 노동을 유보한다는 개념이다. 여가 1시간에 부여하는 주관적인 가치인 것이다. 가령 월급을 300만원 받는다면 일하지만 200만원을 받는다면 하지 않는다. 하지만 250만원을 주면 둘 사이에 어떤 쪽이든 무차별하다. 이때 250만원이 유보임금이다.
지영과 같이 자녀가 있는 기혼여성의 경우 여가 시간은 육아, 가정 내 돌봄 시간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을 보면 최적 균형점인 C점에서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한다. 이 경우 OA만큼 돌봄노동을 하고, AB만큼 시장노동을 하게 된다. 기혼 여성은 대신 자녀를 돌봐줄 사람이나 기관에 양육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이 비용을 뺀 나머지가 ‘순 시장임금’이 되는데, 이 때문에 유보임금이 높아져 자신의 모든 시간을 돌봄노동에 쏟게 된다. 에서의 최적 균형점 D의 상태다.
지영이 옛 상사와 다시 일하고자 나섰다가 도로 주저앉게 된 이유도 높은 유보임금에 있다. 자신이 일하는 시간에 아이를 돌봐줄 베이비시터가 구해지지 않는 데다 버는 돈보다 돌봄을 외주화하는 데 드는 돈이 더 커서다. 그래도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옛 동료의 말에 지영은 “말처럼 쉬워?… 내가 나가서 오빠만큼 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번 돈 아영이 어린이집이랑 시터 월급 주고 나면 모자랄 수도 있어”라고 털어놓는다. ‘육아빠’가 만드는 워킹맘베이비시터가 구해지지 않자 배려심 깊은 착한 남편인 대현은 육아휴직을 결심하게 된다. 시어머니가 극구 반대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결국 영화의 결말 장면에서 대현은 딸을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는 모습을 보이며 육아휴직을 한 것으로 묘사된다.
대현의 육아휴직 결정은 쉽진 않았다. 승진에서 밀리고, 돌아와도 책상이 빠져있을 것을 걱정하는 다른 남자 동료를 착잡하게 바라보는 대현이 그려지기도 한다. 영화가 ‘극현실주의’라고 평가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개인 연차도 사용하기 어려운 마당에 장기 휴직은 언감생심이라는 얘기는 직장인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 비일비재하게 나온다.
그러나 대현의 육아휴직은 지영에게도, 국가에도 바람직한 선택이다. 1974년부터 남녀 모두 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한 스웨덴은 성평등 사회 분위기를 바탕으로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높였다. 일방적인 육아 부담이 줄어드니 출산율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됐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98명(2018년 기준)인 것에 비해 스웨덴의 합계출산율은 1.85명(2017년 기준)이다.
스웨덴에서는 이렇게 육아에 참여하는 아빠들을 ‘라테파파’라고 부르고 있다. 한 손엔 카페라테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유모차를 끈다고 해서다. 한국에서도 남성 육아휴직을 독려하는 분위기가 점차 확산하면서 라테파파의 한국식 신조어인 ‘육아빠(육아하는 아빠)’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했다. 취업자가 된 지영이 GDP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누군가에 빙의된 것처럼 행동하던 지영은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한다. 남편이 육아를 맡게 되면서 사회생활도 다시 시작한다. 늘 무기력하던 지영은 대학 입학 때 꿈꿨던 작가로 일하며 웃음을 되찾는다. ‘경제활동인구’로 돌아온 것이다. 노동가능인구(15~64세)는 경제활동인구(취업자+실업자)와 비경제활동인구(전업주부+재학생+구직단념자+취업준비자)로 나뉜다. 전업주부인 지영은 비경제활동인구이지만, 작가로서 일하는 지영은 경제활동인구 중 수입을 목적으로 일하는 ‘취업자’에 해당한다.
지영의 경제활동 재참여는 국내총생산(GDP)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물론 가사노동이란 무형의 생산가치도 GDP에 포함돼야 한다는 주장과 실제 기여도를 측정하는 연구결과도 있지만 공식 GDP 계산에선 빠진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보고서 ‘경제활동인구 및 인적자본 증대를 통한 성장잠재력 제고’에서는 경제활동 참여와 GDP 간 상관관계를 ‘코브 더글러스 생산함수(Cobb-Douglas production function)’로 설명한다. 의 코브 더글러스 생산함수 형태로 나타낸 국가 경제의 총생산함수에서 Y는 GDP, A는 총요소생산성, K는 물적자본의 총량, L은 노동총량, h는 근로자 1인당 인적자본, a는 투입 자본에 분배되는 비중을 뜻한다.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노동총량(근로자 수) L이 커져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L을 키우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출산율을 높이고, 단기적으로는 여성을 노동시장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저성장에 들어간 한국 사회에 여성 인력 활용은 필수적이다. 이는 곧 집에 갇힌 수많은 ‘지영’들을 나올 수 있게 해야 하는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의미다.
사실 영화는 불안한 해피엔딩이다. 대현의 육아휴직이 끝나면 지영은 다시 일을 놓아야 할까, 아영이 어린이집에서 오랜 시간 잘 버텨주길 바라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조부모들의 손을 빌려야 할까, 둘째가 생기면 도돌이표일까…. 현실에서 수많은 ‘지영’과 ‘대현’의 영화는 오늘도 상영 중이다.
김남영 기자 ny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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