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경제가 전장의 안개에 침몰한 가운데 통화전쟁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팬데믹 종료 및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글로벌 원자재 및 에너지 대란이 벌어지자 스태그플레이션(경제불황 속에서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상태) 공포도 선명해지는 상황에서 통화전쟁의 치열한 샅바싸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냉전이 도래하며 글로벌 경제 분업 시스템 붕괴에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물론 통화전쟁이 벌어지는 전선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살벌한 글로벌 경제 싸움터의 주 무대가 아니다. 또 급격한 변화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가 휘청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통화전쟁의 총성이 울릴 것이라는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달러는 여전히 최강자지만, 여지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하는 남아공 여성. 출처=뉴시스
팬데믹 종료와 전쟁, 가혹한 영수증 끊었다
현재 글로벌 경제는 공급망 교란으로 흔들리고 있다.
팬데믹이 종료되며 각 지역의 생산과 소비시장이 원만하게 연결되지 않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차량용 반도체 등 '산업의 쌀'이 문제다. 심각한 품귀난이 불거지며 전 세계에서 확보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최근 미국과 유럽이 반도체 자급율 상승에 모든 기간 인프라 역량을 쏟아붓는 이유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지정학적 위기가 커지는 것도 글로벌 경제의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미국 등 서방은 러시아의 스위프트 배제 등 강력한 경제제재에 돌입했고 그 여파로 심각한 파열음이 나오고 있다.
나아가 천연가스 및 국제유가 시장의 큰 손인 러시아가 전쟁을 결정하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상황도 심각해지고 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흑해를 통해 독일로 이어지는 천연가스관 노드스트림2 승인이 무산된 가운데 미국은 최근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구매하지 않겠다 선언했고,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에 폭락한 루블화로 천연가스 비용을 결제하라는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 유럽연합이 일제히 반발하며 천연가스 가격은 폭등하고 있다. 이달 초 역대 최고가인 ㎿h(메가와트시)당 345유로까지 솟구치며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제유가 시장도 심상치않다. 러시아의 흑해 원유 파이프라인이 파손되고 미국 원유 재고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 선물은 23일(현지시간) 전일 대비 4.9% 상승한 114.67달러로 장을 마쳤다. 미 바이든 행정부와 불편한 관계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전히 증산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상태에서 OPEC에서도 증산 기조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미국 유전. 출처=뉴시스
니켈 가격도 연초 대비 70% 폭등했고 밀 선물 가격도 이달 초 부셸당 12.94달러까지 치솟은 상태다.
팬데믹 종료에 따른 공급망 교란, 여기에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며 이제 스테그플레이션은 현실이 되고 있다. 당장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이상 하락하고 광범위한 인플레이션이 2.5%포인트 상승할 것이라 우려했다.
한국도 유탄을 피하지 못한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월 생산자물가지수(2015년 100 기준)는 114.82로 전월(114.40)에 비해 0.4% 높아지는 등 스태그플레이션 악몽은 더 커지고 있다. 손진식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물가통계팀장은 “지난달 국제유가를 포함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공산품을 중심으로 생산자물가도 올랐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루블화. 출처=뉴시스
혼란의 시기, 통화전쟁 시작되나
글로벌 경제에 스태그플레이션이 미치는 영향을 두고는 사실 온도차이가 있다. 실제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1일(현지시간) "미국보다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더 클 것"이라 보도했으며 베어링스 투자연구소 마테오 코미네타 수석 이코노미스트도 "미국에 미치는 여파보다 유럽이 더 클 것"이라 진단했다.
심지어 JP모건은 23일(현지시간) "올해 미국이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릴 가능성은 낮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글로벌 경제 지표를 볼 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것은 사실이다. 각 국 중앙은행이 중국을 제외하고 대부분 금리인상을 택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클라스 크노트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유럽중앙은행(ECB) 이사)는 "(상황에 따라 대응의 차이는 있지만)우리는 분명 매우 복잡하고 불확실한 환경에 직면해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스태그플레이션의 악몽이 현실이 되는 가운데 그 주변부에서는 통화전쟁의 신경전도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경제가 침체기에 빠져드는 한편 정치적 이유의 제재 등으로 금융 시스템의 유연도가 낮아지는 순간 은밀한 통화전쟁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달러패권을 흔들려는 의도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 비용을 루블화로 받겠다고 선언한 것은 일종의 '잽'으로 볼 수 있다. 제재에 돌입한 서방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면서 폭락한 루블화 가치를 올리려는 다중 포석이 깔렸기 때문이다.
러시아 가즈프롬의 천연가스 매출 중 58%가 유로화로 결제됐고 39%가 달러화다. 이런 가운데 스위프트에 배제되어 어려움을 겪는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전략무기로 삼아 루블화 사용을 키우려는 전략도 선명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무엇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며 그 어느 때보다 미국 등 서방 중심의 세계관에 한계를 느끼고 있다. 결국 천연가스 비용의 루블화 결제는 단기적으로 루블화 가치를 키우고 장기적으로는 서방 중심의 금융질서를 흔들려는 의도가 진하게 배어있다. 제이슨 투비 캐피털 이코노믹스 선임 신흥시장 이코노미스트가 러시아의 천연가스 루블화 결제 발표를 두고 "서방의 금융시스템 의존도를 흔들려는 것"이라 본 이유다.
통화전쟁의 '간'을 보는 것은 러시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 바이든 행정부와 미묘한 긴강관계를 보이고 있는 사우디가 중국으로 수출하는 원유를 위안화로 결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WSJ에 따르면 사우디는 일 기준 약 620만배럴의 원유를 수출하고 있고 그 중 25%를 중국에 보내며 결제는 달러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만약 사우디가 중국에 수출되는 원유를 위안화로 결제할 경우 국제유가 시장은 물론 달러의 입지도 일부 흔들릴 수 있다.
미국 달러화. 출처=뉴시스
기축통화의 환상 깨지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 주도로 미국 브레튼우즈에서 전후 국제경제의 기틀이 마련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 설립되는 한편 미국 달러를 기축 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 시대가 열렸다.
야심차게 출범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민낯은 의외로 빠르게 노출됐다. 베트남 전쟁 등으로 경제수지 적자가 심각해지고 통화량 증가에 따른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자 미국이 쌓아둔 금을 빠르게 유출시켰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달러에 대한 신용도는 낮아졌다.
결국 금본위제 중심의 달러 기축통화 체제는 1971년 미국 대통령 닉슨에 의해 붕괴됐다. 고작 26년만에 벌어진 일이다.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을 것이 아니라 방코르라는 별도의 통화를 만들자고 주장했던 유명 경제학자 케인즈가 지적했듯이 기축통화는 의외의 모순으로 가득하다. 초강대국(미국)의 무역적자가 이어져야 기축통화(달러)가 유통되지만 이 패턴이 반복될 경우 초강대국의 경기침체가 시작되고 기축통화의 신용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전 일본국세청 조사관이자 자유기고가인 오무라 오지로가 저서 <쩐의 세계사>를 통해 "한 나라의 통화를 기축통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모순"이라고 지적한 이유다.
우크라이나 마리우플. 출처=뉴시스
그럼에도 달러?
물론 오무라 오지로도 인정했듯이 기축통화 개념 자체가 모순이지만 현 상황에서 금 교환이 정지된 달러가 아직도 사실상의 기축통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스위프트에서 배제된 러시아가 천연가스를 루블화로 결제해도, 사우디가 중국 위안화로 원유를 수출해도 달러패권이 흔들릴 가능성은 낮다.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체재가 없기 때문이다.
당장 서방의 제재에 끝모를 폭락을 시작한 루블화는 논할 가치가 없을 정도며 중국 위안화도 치명적인 단점이 많다.
실제로 블룸버그에 따르면 현 스위프트 체제에서 달러는 약 40%의 비중이지만 위안화는 고작 3%에 그치며 우크라이나 전쟁 기간 위안화 가치는 지속적인 하락세다. 관리변동환율제를 통해 사실상 당국이 환율을 임의로 조절하는 것도 한 때 중국이 환율조작국에 오르게 만들 정도로 취약한 리스크다.
그나마 유로화가 가능성이 있으나 2011년 유로존 사태 이후 유럽이라는 블록 내부에서만 안정성을 보인다는 것이 입증된 상태다. 현 상황에서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통화는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CBDC 시장이 새로운 통화패권 전선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 역시 초기 단계라 논하기 어렵다.
다만 브레튼우즈 체제가 경기악화 및 국제무역 침체에서 시작된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스태그플레이션에 따른 균열이 의외의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팬데믹 이후 벌어진 스태그플레이션에 국제정치학의 큰 틀 아래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과 같은 불확실성과 만날 경우 통화전쟁의 판이 일부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신냉전 시대가 열리면 글로벌 경제 블록화 현상이 불거질 수 있다.
산업연구원(KIET)이 22일 연 세미나에서 김석환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치는 경제 변화를 두고 "세계화 시대의 종언과 대분열의 시대가 도래하며 글로벌 경제 블록화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 시나리오가 사실이 되어 글로벌 경제의 세분화가 이어진다면 여전히 굳건한 달러패권에도 미세한 균열이 갈 여지가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끝난 후에도 금 교환이 정지된 달러가 여전히 국제무역 결제의 주역을 담당하면서 미국은 달러를 뿌리고 각 국이 달러를 빨아들이는 패턴이 여전했다. 그 모순과 모순의 끝에는 자본주의의 한계가 존재하며, 눈에 보이는 실체적 악몽으로 2008년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파산인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씨앗이 잉태됐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글로벌 통화정책은 실패했고 모순은 더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팬데믹 종료에 따른 공급망 교란과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신냉전이 시작되어 경제 블록화가 고착화된다면 글로벌 통화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가능성도 생긴다. 말 그대로 최소한의 가능성이지만,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시나리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