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저자의 개인 견해로 로이터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울, 2월22일 (로이터) 임승규 기자 -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세계 경제가 초토화된 지 1년여 만인 2010년 경제학계는 '긴축이냐 부양이냐(austerity vs stimulus)' 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국을 위시한 주요국이 앞다퉈 사상 초유의 부양계획을 발표하며 경기를 끌어올린 끝에 세계 경제가 최악의 위기를 모면했다는 안도감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경기 회복세가 가시화되면서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를 필두로 긴축론자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당면한 위기 극복을 위해 늘린 국가부채를 방치하면 결과적으로 성장을 저해할 수밖에 없는 만큼 하루라도 빨리 비상조치를 정상화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지나치게 이른 긴축 전환은 그나마 살아나던 소비와 투자의 맥을 끊어버릴 수 있는 만큼 재정지출 확대 기조를 최대한 이어가야 한다는 반론도 거세게 일었다.
결과적으로 재정확장 정책을 유지했던 미국이 조금 더 빠르게 글로벌 금융위기 파고에서 벗어난 반면, 긴축의 길을 걸었던 유럽은 이후 장기침체로 빠져들었다.
▲'유동성 폭포' 버전 2.0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출신인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이 최근의 인플레이션 논란 와중에서도 '대규모 경기부양책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는 분명 이전의 경험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 1일 발표된 재무부의 대규모 자금 방출 방침은 현재 옐런 장관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명확히 보여줬다.
재무부는 1분기 채권발행 규모를 지난해 11월 계획했던 1조1270억달러에서 2740억달러로 8530억달러 축소한 반면, 현금 집행은 사상 최대인 9290억달러를 예고했다.
정부가 채권발행을 통해 흡수하는 자금을 줄이고 현금집행을 늘리면 결과는 하나다. 은행으로의 대규모 자금 공급과 자금시장의 대규모 자금 잉여다.
은행들은 이렇게 흘러들어온 유동성으로 유가증권을 매입하거나 대출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해도 남는 돈은 은행들이 연준 계좌에 예치하게 된다.
연준이 이미 정책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내려놓은 상황에서 자금시장의 넘치는 유동성은 초단기 금리를 마이너스 영역까지 끌어내리게 된다. 초단기금리가 마이너스까지 떨어지는 상황에서 머니마켓펀드(MMF)도 유가증권 매입보다 예금을 늘리게 되고 이는 다시 은행의 유휴 유동성으로 돌아온다.
옐런 장관의 의도는 명확하다. 은행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연준 예치금을 늘리는 상황이 되면 그만큼 시장에 돈이 돌게 되고 자금시장의 온기가 기업들에게 미칠 것이다.
지난해 코로나19가 확산된 후 연준이 일관되게 펴왔던 정책이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위기가 정점을 지난 시점이다. 투자자들은 돈을 놀리지 못해 유가증권의 질을 따지지 않고 묻지 마 매수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주요 채권의 스프레드가 역사적 수준까지 좁혀진 상황에서 이런 '유동성 폭포' 정책은 달러 가치의 평가절하만 가속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8년과 달라진 중국..금융안정에 방점
현재 미국과 대척점에서 정책을 펴고 있는 곳이 중국이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4조달러에 달하는 유동성을 풀어 세계 경제를 그야말로 '먹여 살렸던' 중국이다. 그런 중국이 이번에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중국 당국의 변화는 지난해 연말부터 두드러진 중국 국영기업의 디폴트 사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작년부터 한계기업 퇴출을 방치함으로써 재정건전성에 방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최근 중국인민은행이 역레포를 통해 꾸준히 유동성을 흡수한 것도 시장에 분명한 시그널을 주고 있다.
중국의 경우 자산시장의 버블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상해종합지수 등 주요 주가지수가 큰 폭으로 오르긴 했지만 아직 2018년 수준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다.
중국의 유동성 정책 변화는 코로나19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요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럽보다는 현재의 중국이 정책 정상화를 추진하는 데 더 여유가 있어 보이는 이유다.
전 세계적으로 자산 버블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당국이 한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금판은 한은이 맞춰주는 것'..지나친 방심은 위기 불러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최근까지 한국은행의 모든 정책 초점은 시장 전반으로 유동성이 파급되는 속도를 키우는 데 맞춰졌다. 지난해 한은의 무제한 RP 매입, 차액 결제 담보 증권의 제공 비율 20%p 인하 발표가 시장 안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은행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한은 자금조정예금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시장의 '돈맥경화'가 풀렸고 슬금슬금 자산가격이 올라왔다.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을 위한 대출 만기 연장 조치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한은이 유동성을 조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한은이 시중은행의 자금운용역들에게 '자금판 걱정 말고 돈 돌리라'는 시그널을 준 이후로 지난해 하반기 이후부턴 레포 시장의 발작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무조건 책임져 준다'는 인식은 앞으로 자금시장의 리스크를 더 키울 가능성이 있다. 시장의 자생력이 그만큼 약해지기 때문이다. 2014년 연준이 자산 매입 축소(테이퍼링)의 시작을 알린 후 미국 시장에 주기적으로 레포 대란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레포로 자금을 조달한 후 '쓰레기 같은' 채권을 매입했다가 문제가 생겨도 결국은 다시 중앙은행이 살려주는 행태의 반복이다.
한은이 자금판을 책임져준다고 해서 은행 자금담당자들이 넋 놓고 있다간 국내 시장 역시 비슷한 대란을 반드시 그리고 자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편집 유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