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이래 일찍 오셨노? 내 너무 빨리 도착해가 직원들하고 동네 한 바퀴 돌고 왔다 아인교. 이 동네가 내 고향 같은 데거든.”
희끗희끗한 ‘스포츠머리’에 체구도 건장한 중년 남성이 구수한 사투리와 함께 낡은 창호문을 열어젖히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좌중을 압도하는 큰 목소리에 놀라 제대로 인사를 주고받을 새도 없이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30년 넘게 입고 있던 ‘투쟁’이라는 글씨가 적힌 무채색 ‘조끼’를 벗고 말쑥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갈아입은 이 사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을 지낸 김동만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60)이다.
지난 12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인근 ‘남포면옥’에서 김 이사장을 만났다. 김 이사장은 “밥 먹으면서 살아온 얘기 좀 들어보자”는 ‘맛있는 만남’ 인터뷰 요청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고 수차례 고사했다. 그러다 거듭된 요청에 마음을 바꿔먹고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밥 먹을 장소는 을지로 남포면옥”이라고 알려왔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무교동·명동은 내 청춘의 무대
“순양지 어복쟁반 좋아하시죠?”라는 가게 사장의 질문에 “알아서 갖다주이소. 내가 이 집 30년 댕겼는데. 냉면은 머릿수대로 주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김 이사장은 고향 같다는 무교동 일대 이야기부터 꺼냈다.
“근처에 있는 동아빌딩 내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에 한 15년 있었으니까 이 바닥은 훤히 알죠. 외환위기 직후 금융산업 구조조정이 몰아치던 당시 금융노조 위원장을 맡았던 이용득 의원(66·더불어민주당)하고 제가 반(半)농담으로 무교동 상가번영회 회장·부회장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의원은 1998~2004년 금융노조 위원장을, 김 이사장은 2000~2004년 부위원장을 지냈다. 두 사람은 지금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만남 장소인 남포면옥 외에도 인근의 어지간한 노포(老鋪) 이름이 줄줄이 등장했다. 지금은 사라진 KEB하나은행 지하의 두산OB호프, 이민갔던 사람들도 찾는다는 무교동 북엇국집, 테이블 달랑 네 개로 시작해 ‘재벌’이 됐다는 태성골뱅이, 무교동 골목 내 사거리에 있는 2층 골방호프 바니 등등. 모두 김 이사장이 금융노조 간부 시절 조합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때로는 정부 관계자들과 비공식 협상을 했던 곳들이다.
“단골가게 사장한테 영치금도 받아봤다니까요.” 김 이사장은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이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노동계는 물론 정치권, 경영계 할 것 없이 적(敵)이 별로 없다. 후배, 동료들과 자주 다니던 단골가게와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1999년 국민·주택은행 합병 총파업 과정에서 구속돼 약 10개월간 수감됐을 때 태성골뱅이 사장이 영치금을 넣어줬다고 한다. “금액을 떠나서 어찌나 고맙던지요. 같이 수감됐던 이용득 당시 위원장한테는 안 넣어줬어요, 하하. 아마 그 형님은 소주를 좋아하고 난 맥주를 좋아해 더 자주 가서 그랬으려나 ….”
김 이사장은 당시 일이 떠올랐는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갔다. “외환위기 직후에 금융산업 구조조정이 몰아치면서 어쩔 수 없이 감원에 합의한 이후 한동안 이 동네에 발길이 뜸해졌었죠. 어휴,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배구, 육상, 태권도, 합기도…‘진정한 운동권’
“나 사실 이 음식 별로 안 좋아했어요.” 보글보글 어복쟁반이 끓어오르자 수저를 든 김 이사장은 뜬금없이 한마디 했다. “그럼 왜 여길 30년이나 다니셨냐”고 묻자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와의 인연을 소개했다. 1995년 이 대표가 서울시 정무부시장이었을 때 노조 간부들과의 식사자리가 잡혔는데, 그 집이 바로 남포면옥이었다고 했다. “그분이 이걸 얼마나 잘 드시던지…. 면도 넣고 만두도 넣고. 어쨌든 그 양반 따라서 먹다 보니 맛이 들어서 이후 다른 모임도 여기서 많이 하게 됐죠. 1년에 열 번 이상은 오는 것 같네요.”
김 이사장은 마산(현재는 창원) 사람이다. 1978년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 졸업과 동시에 한일은행에 입사했다. 해보지 않은 운동이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는 배구를, 중학교 가서는 배구에 육상까지 했고, 이후 태권도는 사범으로 일하다가 스승이 하던 도장을 물려받아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합기도 6단이라던데 무예단증을 다 합치면 총 몇 단이냐”는 질문에 확인해주진 않았지만 김 이사장의 별명 중 하나가 ‘합이 20단’이다. “아마 20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체육을 전공했을 겁니다. 체대 교수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김 이사장의 나이는 올해 예순이지만 지금도 지인들 사이에선 ‘몸짱’으로 불린다. 건강관리 비결은 ‘등산’이란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안 가본 산이 없어요. 소싯적에는 새벽에 나가서 산행 마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많이 마셨는데, 지금은 혼자 다닙니다. 노총에 있으면서 금강산도 수십 번 다녀왔네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입사 후 군대(해병대)를 다녀오고 복귀해 서울 장충동 지점에 근무할 때였다. “1980년대 초 노조 활동이 활성화되던 시기였죠. 일하던 곳 가까이에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평화시장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민주화 투쟁 현장에 ‘넥타이부대’로 참여하게 된 거죠. 당시는 워낙 투쟁이 강경하던 때라 해병대 나오고 덩치 좋은 것도 노조 활동하는 데 한몫했죠(웃음).”
노동운동 시절 이야기가 길어지자 그만하겠다면서도 33년 동안 가장 아쉬웠던 일은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이라고 했다. “사실 사회적 대화의 교본이라 할 만큼 많은 내용과 합의가 있었는데, 당시 노정 간의 신뢰 부족으로 결국 파기 선언을 했죠.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노동운동 투사에서 일자리 전도사로
어복쟁반이 살짝 바닥을 보일 무렵 물냉면이 들어왔다. 김 이사장은 ‘후루룩’ 소리를 내며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화제는 지금 맡고 있는 산업인력공단 얘기로 옮아갔다.
김 이사장은 2017년 12월 산업인력공단 수장으로 부임했다. 친(親)노동 성향의 새 정부가 출범하고 노동계 출신 인사들이 정부 산하기관 곳곳에 포진하면서 김 이사장도 이른바 ‘낙하산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낙하산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과로 평가받으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사장 취임 후 1년2개월. 김 이사장은 ‘마당발’ ‘에너자이저’ ‘터미네이터’ 등 그 별명에 맞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3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하며 쌓은 인맥을 활용해 한 달에 두 번꼴로 일자리 창출, 능력개발 관련 협약(MOU)을 맺었다. 취임 후 지금까지 체결한 업무협약은 총 37건이다. 대상도 한국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단체는 물론 롯데그룹, CJ푸드빌 등 민간 기업까지 광범위하다. 특히 서울교육청 등 16개 시·도 교육청과도 협약을 맺어 그동안 골머리를 썩이던 국가자격시험 시험장 확보난을 일거에 해소했다. 인력공단이 주관하는 각종 자격시험 수험생은 연 400만 명에 달한다.
조직의 숙원 사업 해결에도 팔을 걷었다. 인력공단의 임금·복지 수준은 338개 공기업·공공기관 중 최하위 수준이다. “취임하고 보니 임금이 낮은 것은 물론 직원들이 편하게 쓸 수 있는 연수원은커녕 콘도 회원권 한 장 없어 놀랐다”는 김 이사장은 국회로, 기획재정부로 뛰어다녀 강릉 연수원 건립을 위한 예산 58억원을 확보했다. 약 1만6500㎡(5000평) 규모의 인력공단 연수원은 올해 착공해 2021년 문을 열 예정이다.
김 이사장이 최근 관심을 두는 분야는 30년 넘게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인력공단 명칭 변경 등 CI(이미지 통합) 개선 작업이다. “개발시대에 붙여진 산업인력공단이라는 명칭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오는 8월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국제기능올림픽 준비와 함께 코스타리카, 콜롬비아 등 5개 개발도상국에 기능인력 양성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국제협력 사업도 펼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김 이사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력공단이라고 하면 자격증 시험 수행기관으로만 알고 있지만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개발·관리, 해외 취업 지원, 취업 알선 등 일자리 창출 핵심 기관입니다. 보다 많은 청년들이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문턱을 더 낮추겠습니다.” 김 이사장의 마무리 멘트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근로자 평생학습 지원, 직업능력 개발·훈련, 자격 검정, 숙련기술 장려사업 및 고용 촉진 등에 관한 사업을 하는 공공기관이다. 한국직업훈련관리공단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설립됐다. 주요 업무는 일학습병행 등 능력개발 사업, 국가자격 시험 출제·시행 등 능력평가 사업, 외국인 근로자 입국과 체류 등 고용허가제 사업 관리 등이다. 청년 해외취업 지원(K무브)과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개발·확산도 주요 사업 중 하나다. 이 밖에 대한민국 명장과 ‘이달의 기능한국인’ 선정, 기능경기대회 주관 업무도 맡고 있다.
김동만 이사장의 단골집 남포면옥
푸짐하고 뜨끈한 어복쟁반 일품…미쉐린가이드도 인정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남포면옥은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이북요리 전문점이다. 가게 입구에 들어서면 항아리가 가득 보이는데 매일 동치미를 담가 날짜별로 저장하고 있다. 이 동치미 육수와 고기 육수를 배합해 평양냉면을 만든다.
대표 메뉴는 평양 향토음식인 어복쟁반이다. 놋쟁반에 잘 삶은 양지머리와 유통(소의 젖가슴 부분)을 놓고 그 위에 채소를 얹은 뒤 육수를 부어가며 끓여 먹는 음식이다. 겨울철에는 이 어복쟁반에 메밀국수를 넣어 먹으면 별미다. 전 세계 유명 맛집을 평가하는 ‘미쉐린 가이드’는 2017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 남포면옥을 서울 맛집으로 선정했다.
유명 정치인들의 단골집으로도 알려져 있다. 음식점 한쪽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이회창 전 국무총리,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등의 친필 사인이 걸려 있다.
서너 명이 즐길 수 있는 어복쟁반은 8만원이다. 기본 메뉴인 평양냉면은 1만1000원이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이나 1호선 종각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있다.
백승현/심은지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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