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현 포스코) 총무과의 이봉관 신입사원은 깐깐했다. 1970년대엔 사내에 옛 직장의 관행을 고집하는 경력자가 많았다. 공문서 양식도 올리는 사람마다 제멋대로였다. 이봉관 사원은 회사 양식과 맞지 않는 서식은 번번이 퇴짜를 놨다. 어느 날 현장 과장이 기안지를 하나 들고 왔다. 박태준 당시 사장의 결재까지 받은 문서였다. 서식을 훑어본 그는 ‘규정에 맞게 다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현장 과장은 ‘내용이 중요한데, 왜 자잘한 걸로 귀찮게 구느냐’며 쏘아붙였다. 실랑이 끝에 이봉관 사원은 기안지를 볼펜으로 좍 그어버렸다. 동료들에게 꽤나 미운털이 박혔던 그는 훗날 매출 1조5000억원에 이르는 서희그룹을 일궈낸다.
“남들이 보기엔 고집불통으로 보였을 테지만, 규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에 충실할 때 융통성도 나오는 법입니다.”
이봉관 회장의 꿈은 소박했다. 안정된 직장에서 정년까지 마치는 게 목표였다. 이른바 ‘범생이’ 기질도 강했다. 모태신앙인으로서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일절 하지 않았다. 산나물로 배를 채우던 어린 시절에도 친구들의 수박 서리를 말리던 그였다. 은근히 겁도 많아 모험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부도 위험이 상존하는 사업은 그의 적성과 거리가 멀었다. 운송부 해운과로 옮기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소박한 꿈이 조금씩 이뤄지는 듯했다. 그랬던 그는 입사 10여 년 만에 돌연 사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번은 사업하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갑자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열심히 자기 일을 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고나 할까. 정년까지 가자는 마음이 한순간에 바뀌어버렸습니다.”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지만 막상 사표를 내려니 불안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망하지 않는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운송부 경험을 살린 물류 사업이 제격이다 싶었다. 마침 포스코가 광양제철소를 지을 때였다. 철강을 실어나르는 육상 운송이라면 안정적인 사업 구도였다. 원칙에 충실했던 그를 평소 눈여겨보던 박태준 회장도 힘을 보태줬다. 1980년 서희건설의 모태인 유성티엔에스가 출범했다.
운송업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을 무렵 지인이 건설업을 제안했다. 1994년 건설업 면허제 규정이 완화됐을 때였다. 이봉관 회장은 손사래를 쳤다. 아파트를 개발하려면 막대한 돈을 빌려야 하고, 때론 과감히 베팅해야 하는데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면허만 있으면 밥을 먹고 산다’는 말이 회자될 때였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만 이 회장은 돈을 빌리지 않고 공사할 수 있는 건설업을 목표로 삼았다. 회사 이름은 서희건설. 세 딸의 돌림자 ‘희(熙)’와 숫자 3의 경상도 사투리 ‘서이’를 합친 말이다.
서희건설은 병원, 학교, 교회 등 이윤은 박하지만 당장 수금이 가능한 분야를 공략했다. 당시 청구, 건영, 우방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설사가 아파트 사업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었지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경험이 없는 회사가 돈을 빌려 사업을 벌이는 건 무리였습니다. 돈을 받는 공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적게 벌더라도 망하지 않고 오래가는 건설업을 추구한 것이죠.”
그의 말처럼 ‘주님의 축복’이었을까. 서희건설은 운도 꽤 따랐다. 교회 건설시장에 진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협에서 교회에 대출을 해주기 시작했다. 훨씬 안정적으로 공사 대금을 받을 수 있었다. 교회 건설시장의 호황이 끝나갈 무렵 병원에 눈을 돌렸다. 충남 서산에서 첫 실적을 쌓은 서희건설은 2007년 공사비만 2800억원에 이르는 1000병상 규모의 부산 해운대 백병원 공사 입찰에 뛰어들었다. 도급순위 65위에 불과했던 서희건설의 맞상대는 업계 수위의 대형 건설회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서희건설은 BTL(임대형 민간투자사업) 방식을 활용해 취득세를 300억원 이상 절감하는 묘안을 짜냈다. 그러나 브랜드가 열세였던 터라 수주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 회장은 당시 백병원 이사장인 백낙환 씨를 찾아갔다. “박태준 회장의 정신을 이어받아 포항제철 못지않은 병원을 건설하겠다”고 호소했다. 백 이사장은 “그 양반 밑에서 교육받았으니 믿을 만하다”며 공사를 맡겼다. 서희건설은 이후 가천 길병원 암센터, 연세대 원주병원 등을 수주하며 병원 공사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이윤이 박하고 사업장 관리가 어려운 지역주택사업에 뛰어든 것도 이 회장의 취향과 맞아떨어진 면이 크다.
리스크가 적은 사업으로 꾸준히 이익을 내려면 부단히 틈새 상품을 개척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서희건설은 ‘개미 같은 회사’다. 서희건설 특유의 캐릭터는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야 끼니를 이을 수 있었던 이 회장의 성장 과정과도 닮아 있다.
경북 영천에서 자란 이 회장의 어린 시절은 ‘광야 40년’에 버금가는 고통스러운 시기였다. 이 회장이 태어난 곳은 평양이다. 해방 후 격변기는 그의 운명을 모질게 바꿔놨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가족이 월남하던 중 부친과의 소식이 끊겼다. 홀어머니 밑에서 그는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고사리 손으로 남의 집 농사를 지었다. 새벽 6시부터 자갈 통을 짊어지는 공사판 막노동 일도 감수해야 했다. 4학년 나이가 됐을 무렵에야 어머니가 그의 손을 붙잡고 학교로 갔다. 어머니 꿈에 부친이 나타나 “봉관이 공부 잘 시키고 있느냐?”고 물은 다음 날이었다.
“늦깎이였으니 수업을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3×3을 묻는데 ‘삼삼하다’고 답했을 정도니. 놀림도 많이 받았습니다.”
머리가 총명했던 그는 입학 1년이 채 안 돼 우등상을 받았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사업가로 성공한 그가 소년소녀 가장을 돕고 있는 이유다.
이 회장은 직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비마다 아이디어와 돌파구를 찾아내준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록도 중요하게 여긴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이란 말은 그의 경영 모토 중 하나다. 그가 꼽는 또 하나의 성공 비결은 ‘손해’. 항상 이익을 양보하는 느낌으로 거래한다는 의미다. 10의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면 절반 이하에 만족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비즈니스는 동업입니다. 협력업체는 물론이고 내 직원들도 나하고 동업 관계입니다. 사실 경영자로서 난 능력이나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내가 조금 더 손해를 봐야 좋은 인재들이 붙어 있지 않겠어요. 하하.”
이정선 기자 leeway@hankyung.com
■ 이봉관 서희그룹 회장 프로필
△1945년 평양 출생
△1966년 경북 문화고 졸업
△1970년 경희대 경영대학 졸업
△1970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입사
△1980년 유성티엔에스 설립
△1994 서희건설 설립
△2019년 현재 서희그룹 회장, 유성티엔에스 대표이사
공대 출신이 장악한 LS전선…무역학과 출신으로 CEO 올라
명노현 LS전선 사장, 전쟁터도 마다 않는 '현장밀착 영업'...
고원종 사장, 자본시장 '스타'되기 거부한 외유내강 CEO
바이오 기업 IPO '흥행 릴레이' 견인…중소형 증권사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