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6만 건. 작년 한 해 국내 상장기업들이 쏟아낸 공시 건수입니다. 투자자들은 하루하루 수백여 건의 공시를 해석하느라 진땀을 뺍니다. 증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공시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승자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한국경제신문 증권부는 를 통해 각종 공시에 숨겨진 의미를 쉽게 풀어드립니다.
요즘 자산운용사와 같은 ‘큰손’ 투자자의 ‘5% 룰’ 신규 보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5% 룰’은 상장기업 지분 5%를 취득하면 즉각 신고해야 하는 지분공시 의무입니다. ‘큰손’ 매매 동향을 알 수 있는 필독 공시 중 하나입니다.
18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에스피자산운용과 GVA자산운용은 코스닥시장 상장기업 TPC메카트로닉스(TPC) 지분을 각각 5.32%(72만여 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했습니다. 하지만 이 공시는 에스피자산운용과 GVA자산운용이 실제 TPC 지분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5% 지분 공시의 보유내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이 보유한 건 ‘주권이 없는 주식’입니다. 주권이란 의결권이 있는 주식으로, 흔히 시장에서 사고파는 주식을 말합니다. 이들이 가진 건 주권이 아니라 전환사채(CB)권입니다. 시장에서 주식을 산 게 아니라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 지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TPC 전환사채에 투자한 두 운용사는 행사가격 조정으로 잠재 지분율이 5%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5% 룰’ 의무가 생긴 겁니다.
기업들은 통상 CB 투자자들에게 주가가 하락하면 일정 시기마다 이를 반영해 전환가를 낮춰주는 ‘리픽싱’을 약속합니다. TPC가 지난해 10월 CB를 발행할 때 애초 전환가격은 주당 4871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발행하자마자 급락장을 거치면서 지난 14일 전환가를 4135원으로 낮췄습니다. 이 CB에 각각 30억원을 투자한 에스피자산운용과 GVA자산운용이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CB 수도 늘어났지요. 자본시장법에선 지분 대량보유 여부를 판단할 때 주권 외에 CB와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도 포함합니다. 따라서 CB 수량으로 계산한 지분율이 5%를 넘어도 ‘5% 룰’에 따라 공시를 해야 합니다.
전환가격 조정으로 인한 CB 투자자들의 5% 신규보고 공시 건수는 작년 11월부터 지난 17일까지 총 30건에 이릅니다. 전년 같은 기간(6건)의 5배 수준입니다. 지난해 코스닥 벤처펀드가 출시되면서 기관투자가 등을 대상으로 CB 발행이 급증했고, 하반기 증시 부진으로 전환가격을 낮추는 기업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CB 발행결정 금액 규모는 5조9520억원으로 전년(3조4951억원)보다 70% 증가했습니다. 지난해 코스닥 기업의 전환가 조정 공시도 998건으로 전년(812건)보다 크게 늘었습니다.
‘큰손’ 투자가들이 한 종목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면 통상 투자자들에게 호재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 주식이 아니라 전환사채권을 보유하고 있다면 호재라기보단 악재에 가깝습니다. 전환가 조정으로 CB 투자자들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물량이 늘어나면 기존 소액주주들이 나중에 ‘폭탄 매물’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유정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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