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자재 가격과 해운 운임이 급등해 중소 제조 현장을 강타하고 있다. 충남지역 한 철망제조업체에서 직원들이 품질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 한경DB
충북의 한 전선제조업체는 이달 들어 수주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핵심 소재인 구리 가격이 급등해 팔면 팔수록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선 공장은 셧다운(일시 가동 중단) 시 재가동 비용이 커 통상 24시간 돌리지만 이 회사는 주말 가동을 멈추고 야간 근무조도 없앴다.
원유를 비롯해 구리 철 등 주요 원자재 가격이 줄줄이 치솟으면서 6만7000여 곳의 중소 제조 현장을 강타하고 있다.
전선의 핵심 소재인 구리 가격은 3월 기준 t당 9000달러대로 작년 동월(5000달러대) 대비 80%가량 올랐다. 전선 제조업체의 공장 가동률은 지난해 80%에서 올 들어 50%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코로나19 불황 속에 자재 가격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하기 어려워 공장 가동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홍성규 한국전선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구리 가격이 1주일 새 t당 500달러씩 급변하는데 어느 회사가 제품을 출하할 수 있겠느냐”며 “상당수 중소업체는 적자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제조업의 근간인 주조, 금형, 단조, 열처리 등 3만2000개 ‘뿌리 기업’에도 비상이 걸렸다. 서병문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과 외국인 노동자 입국 지연으로 한계에 몰린 상태에서 고철 가격까지 1년 새 48%나 올라 개점 휴업 상태인 업체가 많다”고 했다. 국제 유가 인상으로 원유를 주원료로 사용하는 플라스틱 제조업계 역시 타격을 받고 있다. 원유에서 뽑아내는 폴리에틸렌 가격은 1년 만에 60~80% 뛰었다.
가구업계는 주 자재인 파티클보드(PB·나무 조각이나 톱밥을 압착 가공한 건재) 가격이 작년 말보다 30% 이상 올라 타격을 입었다. PB를 비롯해 가죽, 부직포 등 각종 부자재 가격까지 뛰면서 관련 업체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인쇄용지 원료인 펄프값도 1년 새 20% 이상 오르면서 일부 제지업체는 가격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해상·육상 운임도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며 수출입업체에 부담을 주고 있다. 세종시 일대 골재채취업계는 약 40%가 문을 닫았다. 트럭 운반비가 두 배가량 급등하면서다. 펄프·가죽·고철까지 '도미노 급등'…수출 中企, 납품계약 포기 속출
원유값 치솟자 폴리에틸렌·VCM 가격 1년 새 2배로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근로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정부 규제로 신음하는 산업 현장에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악재가 덮쳤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위축됐던 미국, 중국 등 주요국의 산업활동이 기지개를 켜며 원자재 수요가 크게 늘면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제 철광석 가격(중국 칭다오항 수입가 기준)은 지난 17일 현재 166.19달러를 기록했다. 작년 동월(최저 80달러) 대비 두 배 수준이다. 2월 말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발표한 구리·알루미늄 등 비철금속 가격지수(LMEX)는 연초 대비 평균 14% 상승했다. 원자재를 수입해 중간재를 생산하는 중소 제조업체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원자재가 급등에 가동률 ‘뚝’
18일 가구제조업계에 따르면 주요 원자재인 파티클보드(PB: 나무 조각이나 톱밥을 압착 가공한 건재) 가격이 작년 12월 대비 30% 이상 올랐다. 그나마 웃돈을 줘도 구하기 어려워 납품 계약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조달청 입찰을 통해 경기도의 한 학교에 사물함 200개를 납품하려던 한 가구업체는 23㎜ 두께의 PB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
의자나 소파에 사용되는 가죽도 1×1m 크기가 5000원에서 6000~6500원까지 상승했다. 김현수 대한가구산업협동조합연합회 전무는 “중국이 태국·말레이시아산 원자재를 싹쓸이하면서 PB는 물론 가죽, 부직포 등 각종 부자재 가격까지 뛰고 있다”고 말했다. “통상 1분기는 학교 등 관공서 납품이 많은 성수기인데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설명이다.
제지업계도 고전하고 있다. 인쇄용지와 화장지 재료가 되는 펄프값이 작년 3월 t당 541달러 수준에서 최근 650달러로 1년 새 20%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수요 증가와 해운 운임 등 물류비 증가로 당분간 펄프값이 강세를 보일 것”이라며 “펄프를 수입하는 제지업계로서는 수익성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국제 유가·전기료 상승도 ‘악재’유가 인상도 원자재 상승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힌다.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은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제9차 정책점검회의에서 “글로벌 수요 회복 기대와 세계 각지의 기상이변으로 석유·원자재 등의 가격 상승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전선 내 구리를 감싸는 절연재와 피복재의 소재가 되는 염화비닐모노머(VCM), 폴리에틸렌의 가격은 1년 만에 50~80% 올랐다. 원료인 원유 가격이 급등한 여파다.
가공 과정에서 윤활유를 많이 쓰는 단조업계나 전기를 많이 써야 하는 열처리업계도 신음하고 있다. 강동한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원자재 가격과 원·달러 환율 상승세가 겹쳐 원가 부담이 작년보다 20% 가까이 늘었다”며 “올해 대부분 업체가 영업이익을 내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단조업계는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이른다.
올해부터 전기요금에 연료비 변동을 반영하는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가 시행되면서 뿌리기업들이 내야 할 전기료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한 뿌리기업 사장은 “원자재값이 뛰고 전기료도 오르는 상황에서 최저임금 등 규제 비용까지 늘어나니 견딜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상승 추세를 보이는 환율도 걱정거리다. 원자재를 수입해야 하는 기업들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미래전략연구단장은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높아진 가운데 원자재, 환율, 금리까지 한꺼번에 오르면서 중소 제조업계가 ‘4중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주로 중간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이 원자재 인상이라는 위험요인 탓에 모처럼 찾아온 경기 회복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우려했다.
이정선/안대규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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