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창구에서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투자상품을 무분별하게 팔지 못하도록 규제가 대폭 강화될 예정이다. 투자자 보호에 기여할 것이라는 평가와 은행의 성장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란 우려가 엇갈리고 있다. /한경DB
은행 직원이 예·적금 고객에게 펀드를 권하지 못하도록 두 창구가 완전히 분리될 전망이다. 우리·KEB하나은행이 시행하기로 한 투자상품 ‘리콜제’와 ‘숙려제’는 모든 은행에 도입된다.
17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무분별한 고위험상품 판매를 막기 위한 이들 조치가 이르면 다음달부터 시행된다. 금융당국은 지난 14일 ‘파생결합증권(DLS) 사태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고위험 사모펀드의 은행 판매 금지, 사모펀드 최소투자금액 상향 등 핵심 내용은 법을 바꿔야 해 내년에나 시행할 수 있다. 이에 앞서 행정지도로 가능한 것부터 먼저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금융당국은 덩치가 큰 공모펀드를 여러 사모펀드로 나눠 규제를 피해가는 ‘쪼개기 판매’를 차단하기 위해 증권신고서 관리감독 규정을 강화하기로 했다. 은행마다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상품을 팔 수 있는 지점과 직원을 제한하는 등의 내부지침을 마련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투자상품 철회를 보장하는 리콜제와 투자 여부를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는 숙려제도 도입된다.
금융당국의 규제가 지나치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태영 은행연합회장은 “일부 은행의 불완전판매 문제가 전체 은행권의 금융투자상품 판매 제한으로 확대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 내달부터 DLS 행정 지도
'원스톱 서비스' 사실상 폐기
“요즘 예금 금리가 너무 낮잖아요. 수익률 괜찮은 펀드는 어떠세요?”
통장을 들고 은행 입·출금 창구에 앉으면 직원이 이렇게 펀드 투자까지 권할 때가 많다. 이르면 다음달부터 이런 풍경은 사라지게 된다.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증권(DLS) 사태 재발 방지대책의 하나로 은행에서 예·적금 창구와 펀드 창구를 떼어놓는 등의 방안이 단계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이다.
은행권 자율로 투자상품 ‘리콜제’와 ‘숙려제’가 도입돼 가입 철회도 쉬워진다. ‘은행은 원금이 보장되는 안전한 곳’이라는 소비자 신뢰가 깨진 만큼 관리감독과 내부통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게 금융당국의 생각이다.
○‘양날의 검’ DLS 재발방지책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법령과 시행령 개정은 물론 행정지도까지 총동원해 은행의 고위험상품 판매 제한을 예고하고 있다. DLS 사태와 같은 대규모 피해는 줄일 수 있겠지만, 은행의 투자상품 판매도 위축될 수밖에 없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론을 의식해 ‘자숙 모드’인 은행권은 금융당국의 지도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수익성 악화가 걱정거리로 떠올랐다. 정기예금보다 높은 수익률을 낼 수 있는 파생결합펀드(ELF·DLF)와 신탁상품(ELT·DLT)의 판매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들의 ELF·DLF·ELT·DLT 판매잔액은 2017년 말 30조원, 2018년 말 46조원, 올 8월 초 49조원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이들 상품은 주가지수, 금리, 환율 등이 일정 범위에서 움직이면 짭짤한 수익률이 보장되지만 구간을 벗어나면 원금을 까먹는 구조다.
정부는 고위험 사모펀드와 신탁의 은행 판매를 금지하기로 하면서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파생상품 성격이 있어 투자자가 구조를 이해하기 어렵고, 원금을 20~30% 이상 날릴 위험이 있는 상품을 가리킨다. 은행이 고난도 상품을 팔려면 공모펀드 형태를 갖추거나, 안전자산 편입비중을 높여 위험도를 낮춰야 한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파생상품을 빼고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설계하면 고난도 상품에서는 제외되겠지만 연 5% 이상의 고수익률을 기대하긴 어렵게 된다”며 “소비자들이 외면할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은행들 “원스톱 서비스에 역행”
고난도 금융투자상품의 기준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 한동안 시장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금융위는 “2주 동안 업계 의견 수렴을 거쳐 구체적인 판단 기준을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난도 상품 여부는 정부가 제시한 기준에 따라 금융회사가 판단하되, 자체 판단이 힘들면 금융위가 별도 논의를 거쳐 결정해준다는 방침이다.
업계 관계자는 “1차적으로 금융회사가 판단하도록 한다지만, 현실적으로 금융위 의중을 살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위험성이 있는 상품의 설계나 판매가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 있다”고 했다.
은행권에서는 다양한 투자상품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처럼 한 창구에서 예금·대출·펀드 등 여러 업무를 한번에 볼 수 없게 되면 소비자가 번거로워진다는 것이다. 과거 몇몇 시중은행이 입·출금 등 간단한 업무만 가능한 창구를 운영하다가 다시 통합창구로 전환한 것도 소비자의 불편함이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A 창구에서 예금 업무를 보다가 펀드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다시 번호표를 뽑고 B 창구로 가야 한다면 고객으로선 불편할 수밖에 없다”며 “한 창구에서 모든 업무가 가능하도록 설계한 원스톱 서비스의 취지가 무색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원스톱 서비스’에 맞춰 인력 배치와 직원 교육이 이뤄졌는데 예금과 펀드 창구가 분리되면 인력을 완전히 재배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KPI 개편·PB 전문성 강화 유도
금융당국은 지난달에 이어 다음달 모든 은행의 준법감시인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어 소비자 보호를 위한 내부 통제를 철저히 하도록 지도할 예정이다. 직원들의 무리한 영업을 유발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핵심성과지표(KPI) 개편도 유도한다. KPI에 고객 수익률 반영 비중을 높이도록 하고, 고액자산가를 상대하는 프라이빗뱅커(PB)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임현우/송영찬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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