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영향이 에너지에서 곡물로, 유럽을 넘어 글로벌 곡물 가격 상승으로 확산되고 있다. 농산물 시장의 구조적인 변화, 이로 인한 추세적인 농산물 가격 상승은 낮다는 판단이나, 공급차질, 비료 가격 급등, 수출 제한조치는 식품가격의 상승세를 지속시킬 것이다. 글로벌 물가가 높은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 역시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왜 식품가격지수는 전체 가격지수를 줄곧 밑돌았을까.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1970년대 식량위기를 경험한 세계 각국은 식량 안보 강화 차원에서 경작지 확대, 우량품종 및 화학비료 개발, 관개시설 확충 등 R&D 투자를 확대하였다. 그렇다면 농산물 가격이 추세적으로 상승세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경작지 축소, 품종 변화, R&D 후퇴 등이 전제되어야 한다. 신흥시장국의 도시화 작업 진행에도 콩, 옥수수 등의 재배면적으로 오히려 2000년 이후 각각 70%, 40% 늘어났다. 기상이변으로 인한 작황 위험은 남아있으나 농산물 가격이 추세적으로, 다른 원자재에 비해 큰 폭으로 상승할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추세적인 상승 가능성은 아직 낮다고 본다 하더라도 최근의 작황, 비료 가격, 각국의 정책을 보면 농산물 가격 상승이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첫 번째는 작황의 문제이다. 전세계 옥수수 수출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비중은 50%, 밀은 30% 가량(2018/2019년 기준)을 차지한다. 당장의 공급 차질도 문제이지만 최근 급등한 비료 가격이 곡물 가격 상승 압력을 더하고 있다. 질소계 비료인 요소 가격과 인계 비료인 인산 가격은 천연가스 등 에너지 가격 상승과 무역정책 및 운송비 상승으로 전쟁 이전인 2021년 초부터 급등세가 이어졌다. 생산량으로 보면 전세계 옥수수 생산량 중 미국 비중은 34%, 중국은 24%로 절대적이지만 자국 소비가 상당한 양을 차지하는 만큼 수출 여력은 제한적이다. 공급차질이 가격 상승으로 지속될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수출제한 조치이다. 유가, 철강 등 다른 원자재의 경우에도 가격 급등, 수급 불안정 등에 대응해 수출 제한조치가 가해지기도 하지만, 곡물의 경우 수출제한 조치가 더욱 빈번하게 쓰여왔다. 실제 에그플레이션 우려가 크게 부각되었던 2008년 식량 위기 전후 미국, 중국, 러시아,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등 국가들은 다양한 품목에 대해 수출 금지 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팬데믹 이후에도 다수 국가들이 식료품 수출 금지 조치를 시행 중이다.
농산물 가격이 장기간 안정적인 흐름을 이어온 만큼 그동안의 인플레이션 분석은 통화량, 유가, 환율 등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곡물가격이 상승한 적이 있었지만 1980년 이후 미국과 한국의 물가 상승률에서 식료품의 기여도는 각각 1%~1.5%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식료품 가격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은 브라질, 인디아 등의 신흥국에 국한된 문제였다. 신흥국이 상대적으로 곡물 가격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방 압력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팬데믹과 병목현상이 물가에 가져올 영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처럼 곡물가격 상승이 가져올 물가 영향 역시 불확실성이 상당하다. 글로벌 물가 상승률이 높은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곡물 가격이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식품 가격 상승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식품 가격 상승이 전세계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오랜 기간에 꽤 클 전망이다. 인플레이션 장기 전망을 할 때, 곡물 가격과 식품 물가가 가진 독특한 특징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곡물은 수요보다 공급이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가격 변동성이 커진다. 경기에 따라 수요변화가 큰 에너지나 비철금속과는 달리, 곡물은 수요가 매우 꾸준하다. 식품을 통해 인간이 기본욕구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급 계절성은 다른 원자재에 비해 훨씬 강하다. 원유와 천연가스, 비철금속은 계절에 상관없이 채굴이 가능하지만, 곡물은 파종하고 수확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파종기와 수확기에 문제가 생기면 공급에 치명적이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곡물의 공급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료 수출에 문제가 생기면서 수확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비료 수출국이다. 암모니아, 칼륨, 요소의 전세계 수출량의 23%, 21%, 14%를 차지, 비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농가에서는 비료를 덜 쓰기 시작했고, 전세계 곡물 수확량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곡물 가격은 식품 물가에 매우 서서히 반영되고 하방 경직성이 매우 강하다. WTI 유가에 2주 후행하는 휘발유 가격과는 달리, 식품 물가는 곡물 가격을 3분기가량 후행하면서 상당히 천천히 반영한다. 필수소비재인 식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선물 같은 파생상품을 활용해서 장기간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곡물 가격 상승분을 신중하게 반영한 만큼, 식품가격은 한 번 으르면 떨어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휘발유 가격은 WTI 유가가 하락하면 하락하는 반면, 식품가격은 곡물가격이 내려와도 하향 조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최근 식품 가격 상승세는 최근 곡물 가격 상승분이 아니라 작년 상반기의 곡물 가격 상승분을 시차를 두고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에그플레이션을 긴 관점에서 봐야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