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차선을 바꾸고 적절한 시기에 방향을 전환할 준비를 하는 상황이 됐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기준금리 인하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지난 5월 금융통화위원회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 직후 “아직 (금리 인하) 깜빡이를 켠 상황은 아니고, 자료를 보고 깜빡이를 켤지 말지 고민 중인 상태”라고 언급한 데서 한 발 나아간 발언이다.
이날 오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올해 하반기 첫 통화정책방향 회의에서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연 3.5%로 조정 없이 동결했다. 금융통화위원 7명이 ‘전원 일치’로 내린 결정이다. 한은은 지난해 1월 기준금리를 연 3.25%에서 0.25%포인트(p) 높인 후 12차례 연속 금리를 묶었다.
이번 결정으로 한은은 역대 최장 동결 기간 기록을 다시 쓰게 됐다. 지금까지 가장 긴 동결 기록은 지난 2016년 6월 9일부터 2017년 11월 30일까지 연 1.25% 수준의 금리를 유지했던 1년 5개월 21일이다. 현재 기준금리인 3.5%는 작년 1월 13일부터 이날까지 1년 5개월 28일 동안 이어지는 상황이다. 다음 달 22일 예정인 다음 금통위 시점까지 고려하면 3.5%는 1년 7개월 이상 유지되는 셈이다.
이변 없는 ‘동결’ 결정…‘석 달 뒤 인하 가능’ 위원 2인
시장에서는 한은이 이번에도 이변 없이 금리를 12회 연속 동결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지난 4월 이후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3개월째 2%대를 기록하며 목표 수준에 근접하고 있지만, 역대급으로 벌어진 한미 금리차와 들썩이는 환율, 가계부채 증가세 등은 한은이 섣부른 금리 인하를 경계하는 요인이다.
시장의 관심은 금리 인하 시점을 가늠할 수 있는 ‘인하 소수의견’의 등장 여부에 쏠렸다. 올해 8월, 10월, 11월 세 차례의 금통위 회의가 남은 상황에서 피벗(통화 정책 전환) 시점을 예상할 수 있어서다.
기대와 달리 이번 금통위에서는 금리 인하 소수의견이 나오지 않았다. 이 총재는 이날 금통위가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저를 제외한 금통위원 6명 중 4명은 앞으로 석 달 동안 금리 수준을 연 3.5%로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며 “2명은 향후 3개월 이내에 기준금리를 낮출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밝혔다.
이 총재에 따르면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열어둔 위원들은 물가 상승률이 낮아졌기 때문에 금리 인하 가능성을 논의할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외환시장 동향과 가계부채 움직임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나머지 4명은 “인플레이션 안정에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금리 인하 기대가 외환시장, 주택 가격, 가계부채 등을 통해 금융안정에 미치는 영향을 더 점검하고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1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금리 인하 시기 검토할 것…상당 시간 걸릴 수도”
이 총재는 이날 6월 중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2.4%로 안정세를 보이는 데 대해 “매우 긍정적인 변화로 예상에 부합하는 결과”라며 “지난 5월보다 물가 상승률이 안정 추세를 보이는 만큼 이제는 적절한 시기에 방향 전환을 할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금통위 통화정책방향 의결문에는 ‘기준금리 인하 시기 등을 검토해 나갈 것’이라는 문구가 처음 등장했다. 지난 2월 긴축 기조를 ‘충분히 장기간’ 유지해야 한다는 문구가 지난 4월 ‘충분히’로 바뀐 이후 7월엔 ‘금리 인하’까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는 통화 정책 방향의 전환 시점에 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 총재는 “외환시장,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가계부채 움직임 등 마치 ‘(차선 변경 전) 뒤에서 달려오는 차들’처럼 위험 요인이 많아서 불확실한 상황”이라며 “(통화 정책 방향을 바꿀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총재는 “향후 3개월 내 기준금리에 대한 금통위원의 전망을 취합한 ‘포워드 가이던스’는 조건부”라며 “현재 시점의 물가와 금융 안정 상황이 유지될 경우 석 달 동안 금리가 유지되거나,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특정 월에 금리를 내리겠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며 “미국의 정책 결정은 외환시장과 환율에 주는 영향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고려 사항이긴 하지만, 가계부채 등 국내 금융 안정에 대한 고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므로 종합적으로 판단해 시기를 (금리 인하)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11일 오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사진=강예슬 기자
“시장 기대 과도…정부와의 정책 공조 중요”
현재 시장의 기대가 과도하다고도 지적했다. 이 총재는 “대다수 금통위원도 현재 시장의 기대는 과도하다고 우려했다”며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를 선반영해서 부동산 가격 상승 기대 등이 형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고 전했다.
금리 인하 기대가 가계부채 상승세를 자극할 위험성에 대해서는 “지난 5월보다는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상승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고 우려했다.
이 총재는 “금융 안정에 대한 고려가 커졌다”며 “가계부채 수준을 중장기적으로 낮춰가는 게 중요한 정책 목표라는 점에서 유의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정부와의 거시 건전성 정책 공조가 굉장히 중요해진 시점”이라며 “한은이 직접 주택 가격을 조절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동성을 과도하게 공급하거나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해 잘못된 신호를 줘 주택 가격 상승을 촉발하는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금통위원 모두 공감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