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은(고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향은고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는 자녀 수의 평균, 곧 합계 출산율은 0.92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출산 기피 배경에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있지만, 맞벌이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자녀를 돌봐줄 마땅한 양육자를 찾기 어려운 현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거에는 조부모부가 주된 양육 자원이었다. 조부모가 손자녀와 한집에 살거나 가까이 살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언제든 부모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가용 인력으로 존재했다.
근래에는 자녀와 분거하는 경우가 늘어 긴밀한 지원이 어려워졌다. 같이 살아도 혈기왕성한 손자녀를 돌보는 일은 육체적·정신적으로 버거운 일이다. 자녀양육의 짐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질 무렵에 다가온 손자녀 양육은 또 하나의 굴레로 인식되고 있다. 손자녀 양육을 두고 과도한 의존이나 상이한 가치로 자녀와 갈등과 충돌을 빚기도 한다. 때로 손자녀 양육을 거부하거나 양육비를 청구하는 경우도 있다. “손주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우스갯소리에는 조부모의 고충이 담겨있다.
이처럼 손자녀 양육은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나 조부모에게 주는 유익도 크다. 조부모는 손자녀의 존재 자체로 기쁨을 맛본다. 자칫 단조롭고 건조할 수 있는 노년에 생기발랄한 손자녀가 삶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자녀를 기를 때는 미처 몰랐거나 놓쳤던 것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고 인생의 경륜과 지혜를 발휘해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마무리해야 하는 노년의 발달과업을 손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다.
한편 조손관계가 손자녀에게 주는 유익 역시 다양하다. 조부모는 보살핌이 필요한 손자녀에게 긴요한 돌봄을 제공하는 신뢰로운 지원처다. 조부모는 부모의 사랑과 유사한 일차적 가족 사랑을 경험하게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부모의 사랑과는 결이 다른 차원의 사랑을 느끼게 한다. 손자녀는 조부모를 통해 모방과 동일시 인물을 다채롭게 접촉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건강한 자아정체감의 뿌리가 되어 손자녀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안전한 신뢰의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필자는 할아버지 사랑은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할머니 사랑은 경험해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할머니와 보낸 시간을 기억한다. 유년의 추억으로 저장된 할머니와의 관계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몸으로 체감되는 느낌으로 저장돼 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내면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감각으로 기억된다. 특별히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은 멀리 사셨던 할머니를 자주 만나지 않았어도, 할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어, 이후로 긴 시간이 흘렀어도 지금껏 선명하고도 뚜렷한 자취와 흔적으로 남아있다.
외할머니에게 필자는 각별한 존재였다. 당신의 고명딸이 오랜 유산 끝에 어렵게 얻은 첫 자녀였기에 더 소중한 생명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은 흔들림 없는 반석과도 같다. 그 사랑은 살면서 부딪는 크고 작은 고난과 시련을 꿋꿋이 버텨낼 힘이 되어 손녀의 삶을 지탱하는 축이 됐다. 그리고 할머니가 없는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그 사랑에 보답할 마음으로 살아 있다. 깊은 우물 같은 조손간의 돈독한 관계는 온갖 걸림돌을 극복하고라도 두레박으로 애써 길어 올릴 가치가 있는 축복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