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물러나지만 가치주의 시대는 다시 돌아옵니다. 내년 1분기에 기회가 찾아올 것 같습니다.”
‘국내 가치투자 1세대’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불려온 이채원 한국밸류운용 대표(사진)가 물러난다. 이 대표는 한국밸류운용 창립 멤버로 16년간 한국의 가치투자를 정착시킨 상징적 인물이다. 원조의 퇴장은 가치주 논란에 다시 한번 불을 붙일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망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물러나는 한국의 버핏
이 대표는 8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인터뷰에서 “성과 부진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결정”이라고 사의를 밝힌 이유를 전했다. 그는 오는 11일께로 예정된 인사를 앞두고 스스로 한국금융지주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 2~3년간 수없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이 대표는 1998년 국내 최초의 가치투자펀드 시리즈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후 동원투신운용 자문운용본부장과 한국투자증권 자산운용본부장 등을 거친 그는 2006년 한국밸류운용 창립 멤버로 시작해 대표 자리까지 올랐다.
‘원조 가치투자자’로 불리는 이 대표는 ‘가치주의 몰락’이란 표현이 뼈아팠다고 했다. 그래서 보란듯이 성과를 낸 뒤 대표직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하지만 ‘제로(0)금리’ 시대에 성장주의 질주에 맞서기엔 버거웠다. 펀드평가사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한국밸류운용의 연초 이후 수익률(국내 주식 기준)은 46곳 가운데 최하위권이다. 선두권에 있는 운용사들이 40%에 달하는 수익을 내는 동안 10% 남짓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과거에도 어려운 시기는 있었다. 고객들이 항의가 빗발쳤고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기다림은 큰 결실로 이어졌다. 2000년부터 6년간 가치투자로 435%의 고수익을 거두기도 했다. 가치투자의 길을 함께 걸어온 강방천 에셋플러스 회장은 “재무제표와 기업에 대한 정량 평가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고수해온 이 대표의 투자 방식은 수익률과 관계없이 업계의 소중한 자산이자 롤모델이었다”고 평했다. 다시 불붙은 가치주 논란이 대표가 물러나면서 가치주에 대한 논란은 재점화되고 있다. 업계에선 ‘대가의 용퇴가 서글프다’는 반응과 함께 가치주의 몰락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가치투자는 비교적 싼값에 좋은 기업의 주식을 사는 투자를 말한다. “주가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싼 주식을 산다”는 이 대표의 말이 가치투자를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주가수익비율(PER), 주가순자산비율(PBR) 등으로 투자 가치를 평가했지만 전례 없는 유동성의 힘 앞에서 이들 지표는 무용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내년 1분기 다시 가치주에 기회가 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가 1.5%가 도달하는 시점이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패시브 자금이 주도하는 시장에서 금리가 오르면 성장주는 무조건 꺾이게 돼 있다”며 “내년 1월 미국 상원 다수당이 결정되면 경기부양책이 힘을 받아 경기민감주가 움직이고 금리가 올라 가치주가 수익을 내는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 대표와 함께 가치투자 1세대로 분류되는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대표도 “가치주의 시대는 다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부동산과 주식의 가치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부동산처럼 주식을 장기투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변동성이 큰 성장주 대신 장기투자가 가능한 가치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면 여전히 성장주와 비교해 가치주의 매력에 의구심을 갖는 의견도 상당하다. 가치주에 대한 논란은 국내외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대표도 미국보다 국내에서 가치주가 주목받기 어려운 구조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주주환원율로 보면 글로벌 평균이 50%가 넘는데 한국은 20%에 불과하다”며 “기업 지배구조나 주주환원정책이 바뀌지 않는 이상 가치주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털어놨다.
박재원/양병훈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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