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증권거래소가 착공 2년 10개월 만인 1979년 7월 2일 개관됐다. 증권거래소 객장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한강을 피할 게 아니라 정복해 버리자!’
한강 범람으로 인구 380만 서울에 4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1966년 7월. 헬리콥터에서 처참한 상흔을 내려다보던 당시 불혹(40세)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피가 끓어올랐다.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불도저’로 불렸던 그는 곧바로 한강 유역 백사장을 강변도로와 제방으로 탈바꿈하는 대공사에 돌입했다. 이어 이듬해 12월엔 한강 한가운데에 한국 최초의 계획도시를 세우겠다는 구상을 공개한다.
장마 때마다 물에 잠겨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해 사람들이 ‘너나 가지라’는 뜻으로 이름 붙인 모래 땅. 여의도(汝矣島)는 그로부터 6개월 만에 군사정부의 ‘한강 정복’을 상징하는 항구적인 마른 땅으로 솟아올랐다.
‘금융과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여의도 개발의 초기 구상은 본래 금융산업과 무관했다.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은 땅 위의 거대한 인공 보행로가 섬을 동서로 관통하고, 보행로 양 옆을 고층빌딩이 에워싸는 ‘입체적 업무도시’를 그렸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와 재정적 문제가 얽히면서 기존 계획은 누더기로 변해 버린다.
대규모 증권타운 입주 계획은 명동 증권거래소(지금의 한국거래소)가 확장 이전을 결정한 1974년에야 구체화됐다. 금융 중심지로서 위용을 갖춘 것은 1990년대 중반 증권사들이 앞다퉈 마천루 신축에 나서면서부터다.
여의도는 2000년대 중반 ‘동북아 금융허브’ 성장 전략에 따른 종합금융 중심지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한파가 덮친 데다 규제 개선이 지연되면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뒤바뀐 미래도시의 꿈
‘콰광쾅.’ 1968년 2월. 귀를 찢는 듯한 폭발음과 메아리가 서울 하늘에 울려퍼졌다. 한강 흐름을 방해하는 밤섬을 폭파하는 소리였다. 본격적인 여의도 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잔해는 여의도 둘레 7㎞에 높이 15m 둑을 쌓는 윤중제(輪中堤) 공사의 골재로 썼다. 김 시장은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290만㎡ 규모의 인공대지 조성을 단 100일 만에 끝냈다.
토지이용계획은 김수근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이 맡았다. 1969년 공개한 마스터플랜에 따르면 여의도 서쪽 끝에는 이미 이전을 확정한 국회의사당이 서고, 동쪽 끝은 서울시청과 대법원, 종합병원 부지로 꾸며졌다. 지상 7m 높이 거대한 하늘 보행로 밑은 신호등이 없는 차로가 교차하고 대형 공원도 곳곳에 자리했다. 1인당 국민소득(GNI)이 200달러 수준이었던 당시 국민들의 눈에 비친 여의도 개발 계획은 그야말로 ‘꿈의 수상도시’였다.
1970년 4월8일 붕괴한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현장. 새벽 6시30분 발생한 사고로 33명이 사망했다. 국가기록원 제공
그러나 여의도 운명은 1970년 4월8일 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창전동 와우지구 시민아파트 붕괴 참사로 송두리째 바뀐다. 철거민 이주 목적으로 6개월 만에
완공한 와우 아파트 부실공사가 드러나면서 ‘불도저 시장’의 사임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바통을 이어받은 양택식 시장은 여의도 개발을 현실적인 방향으로 전면 수정했다. 첫 사업은 날림공사 오명을 씻고 재원을 확충하기 위해 추진한 시범아파트 건설이었다. 당시 한국 최고층(13층)이었던 시범아파트 24개 동은 당초 대법원을 염두에 뒀던 부지에 1971년 들어섰다.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여의도 중앙에 1971년 조성한 초대형 아스팔트 광장(현 여의도공원)은 여의도를 동서로 두 동강 내며 도시계획 마스터플랜을 완전히 어그러뜨린다.
1973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신축 공사 전경. 국회사무처 제공
국회의사당(1975년 완공) 터를 뺀 대부분이 나대지로 남아 있던 땅에 신도시를 올리는 공사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주요 공공시설 유치에 난항을 겪던 서울시가 적극적으로 땅을 내다팔면서 순복음교회(1973년), KBS(1976년), 우체국(1975년), 한국노총회관(1975년), 한국화재보험협회(1977년), 한국교직원공제회(1978년), 전국경제인연합회(1979년) 입주 소식이 잇따랐다. 종합병원을 계획했던 동쪽 끝 자리엔 나중에 63빌딩(1985년)이 들어섰다.
증권거래소는 동양 최대 입회장을 갖춘 사옥을 준공하고 1979년 7월2일부터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은 한발 앞선 1978년 화재보험협회빌딩에 자리 잡았다. 명동에 있던 증권사들은 이때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를 바쁘게 오가며 본사 이전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모래땅이 ‘한국의 맨해튼’으로
“물에 둘러싸여 길하지만, 모래 땅이라 흉하다.”
증권사들은 장기간 본사 이전을 주저했다. 여전히 많은 이용객들이 명동을 찾았고 풍수 사상에 젖어 있던 기업주들도 여의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대동지지나 동국여지비고는 여의도를 사주(沙洲)로 표기하며 모래땅에 불과한 곳으로 치부했다. 일제 강점기 때도 간이 비행장으로 쓰인 게 전부였다. ‘주색(酒色)의 기운이 강해 망신살을 경계해야
다’는 명리학적 해석이 1970년대 말 증권가에 떠돌 만큼 증권사들은 이전에 대한 불안감이 컸다.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들어선 이후 반세기 금융중심지 역할을 한 명동에서의 증권거래 주문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여의도를 능가했다. 1979년 증권거래소 별관에 입주하는 방식으로 일찌감치 본점이나 지점을 낸 국일(지금의 KB), 신흥(현대차) 등 중소형 증권사들은 “식당도 없고 정보도 얻기 힘든 고도(孤島)”라고 투덜거렸다.
입지와 주변 경관을 중시하는 사고 방식은 국회도 다르지 않았다. 일찌감치 여의도 이전을 확정한 국회 사무처는 주변에 건물을 올리는 기업들에 의사당보다 낮은 층고를 강요했다. 지금의 여의도가 여의도공원을 경계로 ‘동고서저’의 형태를 띤 데는 국회 간섭에 따른 영향이 컸다. 이전투구가 끊이지 않는 국회의사당 터가 조선시대 양과 염소 등 가축을 풀어 키우던 양말산(羊馬山) 자리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의사당 완공 당시 국회 관계자는 “산을 깎아 암반이 단단하다”며 옹색한 명당론을 내놔야 했다.
여의도가 ‘한국의 맨해튼’ 면모를 갖춘 건 윤중제 완공 3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다. 1993년 한국투자신탁(현 한국투자증권)을 시작으로 대한투자신탁(하나금융투자), 유화, 동양(유안타), 서울(유진투자), 보람(하나금융투자), 제일(한화투자), 선경(SK), 쌍용증권(신한금융투자) 등이 여의도광장 인근 제2증권타운에 모여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경제 호황으로 덩치를 키운 증권사들은 업무효율성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잇따라 여의도 확장 이전을 결정했다.
대리석으로 꾸민 웅장한 로비에서 고사를 지낸 증권사들은 그러나 몇 년 뒤 회사를 존폐의 기로에 내모는 거대한 태풍과 맞닥뜨린다. 1997년 닥친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모기업들의 경영 환경 변화였다. 제2증권타운 입주사 가운데 당시 경영권을 그대로 유지한 증권사는 유화증권 한 곳뿐이다.
○아시아 금융허브의 꿈과 변화
한국 대표 금융중심지로 자리 잡은 여의도는 200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원대한 꿈을 품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2020년까지 한국을 홍콩과 싱가포르 수준의 금융중심지로 키운다는 밑그림을 그리고 2005년 한국투자공사(KIC)를 발족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미국 AIG그룹과 손잡고 2006년 최고 54층 서울국제금융센터(IFC)를 착공해 여의도의 새 스카이라인을 그렸다.
그러나 2008년 전 세계를 덮친 금융위기는 글로벌 금융중심지를 향한 발걸음에 제동을 걸었다. 금융규제 개혁과 금융중심지 지원을 둘러싼 정부 정책의 일관성 결여도 국내외 증권사의 이탈을 초래했다. 여의도 제1증권타운의 맹주였던 미래에셋대우는 2015년 조선시대 주전소(鑄錢所) 자리인 중구 수하동으로 사옥을 옮겼고, 대신증권은 지난해 32년 만에 명동으로 되돌아갔다. 삼성증권은 1992년 삼성그룹 편입 이후 네 차례 사옥을 옮겼지만 여의도는 후보지에 없었다.
여의도는 언제부턴가 금융중심지와는 거리가 먼 축제와 여가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0년과 2005년 각각 시작된 서울세계불꽃축제(가을)와 봄꽃(벚꽃) 축제엔 매년 100만 인파가 운집하고 있다. 아스팔트 바닥 여의도광장은 1999년부터 공원으로 변신해 서울의 대표 쉼터로 부상했다. 일제 시대부터 경성(京城)의 젊은이들을 끌어당겼던 낭만의 백사장이 콘크리트 빌딩숲 사이에서 부활한 셈이다.
‘율도명사(栗島明沙)’로 아름다움을 자랑했던 밤섬도 기적처럼 되살아났다. 서울시에 따르면 불도저식 개발의 희생양으로 산산조각 난 밤섬은 폭파 당시 규모의 여섯 배로 커졌다. 자연의 힘으로 흙이 쌓이고 나무가 자란 결과다. 호롱불을 켜고 한강물을 마시며 살던 60여 가구의 터전은 세계적인 도심 철새 도래지로 다시 태어났다.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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