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이 공매도에 활용되는 주식대여를 전면 중단하기로 한 것은 공매도에 대한 일각의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조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등 일부 시민단체는 국민연금이 공매도 세력에 주식을 빌려줘 손실을 자초하고 있다고 비난해 왔다. 정치권도 여론을 의식해 국민연금에 주식대여를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이번 조치에 대한 자본시장 참여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외국인투자자, 기관투자가 등 ‘큰손’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리스크 헤지(위험 회피) 수단 중 하나인 공매도에 부정적 시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에 국민연금이 밀리면서 한국 증시 신뢰도가 추락하게 됐다는 진단이다.
공매도용 주식대여 멈춘 국민연금
김성주 국민연금 이사장은 2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내부토론을 거쳐 지난 22일부터 국내주식 대여 신규 거래를 중지했다”며 “이미 빌려준 주식은 차입기관과의 계약관계를 고려해 연말까지 모두 회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국민연금의 주식대여와 관련해 국민의 우려가 크다”는 질의에 대한 답변이었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서(대차거래) 판 뒤 주가가 하락하면 사서 되갚는 투자기법이다. 주가가 내려가면 차익을 얻지만 오르면 손해를 본다. 선진 증시에서 자유롭게 허용되고 있고 공매도 자체가 주가를 끌어내리는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 개인투자자들은 공매도가 멀쩡한 종목의 주가 하락을 부추기고 주가 조작 등 불공정 거래에 이용된다며 전면 폐지를 요구해왔다.
2000년부터 공매도 주식을 빌려주고 있는 국민연금도 비판 대상에 올랐다. 청와대 인터넷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의 주식 대여를 금지하라’는 내용의 글이 200여 개 올라와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국내 주식대여 시장에서 국민연금의 주식대여 물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0.83%(6291억원)에 그친다. 이에 따라 국민연금 주식대여 중단으로 공매도 시장이 받을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국민연금의 성격을 감안할 때 파장이 클 것이란 분석도 적지 않다. 한 증권사 프라임브로커 사업 담당자는 “국민연금이 총대를 멘 만큼 다른 국내 연기금도 잇달아 주식대여 업무를 중단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외국인투자자에 대한 시장신뢰도가 추락할 가능성이 높은 게 더 큰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중호 KB증권 연구원은 “시장 변동성이 커진 상황에서 투자자들의 손실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헤지펀드의 활성화를 저해할 가능성이 있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공매도 제도 폐지 논란 확산 가능성
국민연금의 이번 조치로 공매도 제도 자체의 폐지 논란이 확산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4월 삼성증권의 배당 사고가 공매도 폐지 논란으로 번지면서 금융당국은 개인투자자의 공매도 기회를 확대하는 대책을 세우는 중이었다.
금융당국은 공매도 폐지 여론이 들끓으면 대책을 마련하는 악순환을 10년째 계속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위원회는 공매도 제도를 열 번 가까이 손봤다. 최종구 금융위원장도 15일 “폐지보다 개선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기존 공매도 규제 가운데 기관투자가에 유리하거나 시장 투명성 확보에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재검토하겠다”고 말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한 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한국의 주식워런트증권(ELW) 시장도 금융당국이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규제에 들어가자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며 “공매도 시장도 한번 건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금융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인데 외국인투자자들이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을 어떻게 판단할지 우려스럽다”고 지적했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수수료 수익을 잃어버리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정숙 민주평화당 의원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13년부터 올해 6월까지 국내 주식대여로 689억원의 수수료를 받았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이번 결정으로 전체 공매도 물량이 줄진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주식대여 시장에서 외국인의 영향이 더 커지고 외국인이 수수료 수익도 더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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