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를 무릎 꿇린 나라. 호주의 커피 문화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1950년대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호주에 에스프레소를 퍼뜨렸다. 1970년대 보헤미안 예술가들은 멜버른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커피를, 동네 카페에서 마시기 시작했다. 호주식 커피인 플랫화이트와 롱블랙은 세계 주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글로벌 커피 메뉴가 됐다. 카페라떼와 아메리카노와 비슷한 형태지만 맛은 전혀 다른 맛을 낸다. 이유는 싱싱한 생두에 있다. 오늘도 멜버른 항구에는 하루 300만 명이 마실 수 있는 생두가 들어온다. 도시에는 수백 개 카페와 로스터리가 각각의 개성으로 공존한다. 스페셜티 커피 문화도 10여년 전 일찌감치 시작됐다. 이런 커피강국에서 4~5년 전부터 한국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호주 국가대표 커피 챔피언은 수년 째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고, 이름난 카페와 로스터리에서 한국 청년들을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의 브랜드를 창업한 이들도 생겨나고 있다.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한국인 바리스타와 로스터들을 인터뷰했다.
①강병우 에이커피 대표
한여름의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호주 멜버른 콜링우드. 지난 29일 이곳에 자리한 ‘에이커피’를 찾았다. 에이커피는 한국인 바리스타 겸 로스터인 강병우 씨(38)가 2017년 창업한 로스터리다. 큰 창고를 개조한 듯 보이는 에이커피에 들어서자 바닥부터 천장까지 새하얀 공간, 그 안에 놓인 긴 커피바가 시선을 압도했다. 공간 안쪽에는 빗자루를 들고 땀을 흘리며 바닥을 쓸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강병우 에이커피 대표(38)다.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화요일에 그는 오로지 로스팅에만 몰두한다고 했다.
호주 바리스타와 로스터 중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호주 스페셜티 커피의 시작을 알린 로스터리 ‘세인트알리’, 이와 양대산맥인 ‘마켓레인’에서 로스터와 바리스타, 트레이너 등으로 일했다. 호주의 한국인 바리스타들에겐 롤모델이 된 인물이자, 호주 주류 커피세계에 발을 들인 한국인 1세대다. 2014년 호주 국가대표를 뽑는 커피대회에서 테이스팅 부문 우승을 했고, 이후 커피 대회의 심사위원이 됐다. 2017년 4월에는 자신의 브랜드 ‘에이커피’를 창업했다. 현재 호주 커피 업계에서 수준급 로스터리로 호평받고 있다.
“2004년 워킹홀리데이를 왔다가 멜버른에 반해 2006년 정식으로 유학을 왔어요. 그때는 사진을 공부하던 때였고, 2005년 잠깐 한국 스타벅스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본 게 다였어요.” 호주의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유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다.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사는 건 고된 일이다. 새벽잠을 물리치고 일어나 아침 6시30분에 카페 문을 열면 하루 종일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하루 평균 바리스타 1인당 300~500잔, 많게는 1000잔까지도 만든다. 그럼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 현지 예술대 학생들이나 유학생들이 많이 몰린다.
“2006년엔 여기 호주에도 에스프레소 문화가 거의 전부였어요. 그러다가 멜버른 최초의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리 카페인 세인트알리를 가게 됐지요. 충격 받았어요. 커피를 수백 잔씩 내리지만, 이 커피가 어디서 왔는 지 어떻게 만들어졌는 지 알 수 없었거든요.” 생두가 가득 담긴 커피 포대, 그 위에 적혀있는 원산지와 생산자의 이름은 그를 매혹했다. 거대한 로스팅 기기 속에서 막 멜버른 항구에서 들여온 생두가 수 없이 많은 향을 뿜어내며 볶아질 때 그는 결심했다. ‘이거다, 한번 해보자.’
세인트알리에 여러 번 지원한 끝에 그는 당시 이 회사의 유일한 동양인으로 입사했다. 바리스타, 트레이너, 로스터로서 일했다. 몇 년 뒤 이 회사는 호주 커피씬에서 최초이자, 최대인 로스터리로 성장했다. 다른 로스터리들도 속속 생겨났다. 커피에 대한 수준이 높은 호주인들은 스페셜티 커피 문화도 금방 흡수했다. 2012년 그는 또다른 대형 로스터리인 ‘마켓레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리스타는 한계를 느낄 때가 있어요. 와인은 생산자가 병에 와인을 담아 마개를 닫는 작업까지 하는데, 커피는 그렇지 않아요. 너무 많은 단계를 거쳐 한 잔의 커피가 완성되지요. 너무 손이 많이 가요. 생산자, 수확하는 사람, 생두를 보관하고 유통하는 사람, 이를 로스팅하고 갈아서 커피를 만들기까지 수십 단계가 있지요. 보다 더 앞 단계로 다가가는 게 로스터 일의 매력이었어요.”
2014년 그는 호주 국가대표 커피 테이스터가 됐다. 커피업계와 미디어 등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커피대회 심사위원으로도 위촉됐다. 그러다 슬럼프가 찾아왔다. 한국을 떠난 지 10년차였다.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어요. 어느 정도 이룬 것 같고, 그럼에도 뭔가 내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스스로 이렇게 질문했어요. 기왕이면 ‘커피의 수도’ 멜버른에서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진짜 경쟁이 시작됐다. 2016년 로스터기도 사고, 브랜드명도 많들었지만 외국인이 창업을 하고, 상업 공간을 꾸리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예상보다 1년 정도가 더 지난 2017년 4월 지금의 ‘에이커피’에 터를 잡고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그 사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에이커피를 창업한 건 내 모든 걸 건 커피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카페가 아니라 커피회사를 만들고 싶었죠.”
에이커피는 로스팅 회사인 에이커피의 철학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룸’이다. 카페처럼 커피를 주문해 바에서 마실 수도 있지만 이 공간의 주 목적은 에이커피의 원두를 찾는 사람들이 직접 와서 커피를 경험해보고 공간을 느끼는 것. 호주는 브런치 문화가 탄탄해서 베이커리나 샌드위치 등을 함께 팔지 않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한 잔에 3000~4000원 사이의 커피는 도심에서 하루 수백잔 씩을 팔아야 겨우 수익이 나는 구조다. “한없이 투명하고, 깨끗한 커피를 만드는 것이 저의 고민이자, 철학이에요. 원두 B2B 시장이 아니라, 홈브루어들을 위한 B2C 시장을 들여다보고 있어요. 많은 이들이 에이커피를 ‘커피 데스티네이션’으로 알아주길 바랍니다.”
창업할 때 이름도 직관적으로 결정했다. 커피 한잔이라는 뜻의 ‘어 컵 오브 커피(A CUP OF COFFEE)’를 줄여 ACOFFEE로 했다. 그가 직접 로스팅한 원두 ‘울리추 와추(에티오피아 구지)’에서는 딸기와 멜론, 복숭아 향이 가득했다 ‘가치라고(케냐 무랑가 카운티)’에서는 여러가지 베리의 향이, ‘로스 캐퓰린(과테말라 후에후에테낭고)’에서는 부드러운 바닐라와 달콤한 설탕의 뒷맛이 올라왔다. 강 대표의 로스팅 원칙은 두 가지다. 에이커피의 원두 패키지에도 적혀있는 말. ‘Preserve natural flavours(내추럴한 향은 지키고), Enhance distinctive characteristics(특별한 개성은 최고로 끌어올릴 것).’ 멜버른=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강병우(BW Kang) 대표 주요 경력 2016년 멜버른 ACOFFEE 창업2015년 호주국가대표 커피대회 테이스팅 챔피언 코치 2014년 호주국가대표 커피대회 테이스팅 챔피언 1위 2014년 월드바리스타챔피언십(WBC) 호주 국가대표 출전, 테이스팅 챔피언십서 5위 2012년 멜버른 로스터리 ‘마켓레인’ 수석 로스터2011년 멜버른 큐그레이더(생두감별사)자격 보유 2006년 멜버른 로스터리 ‘세인트알리’ 바리스타 겸 로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