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지난 6월 김학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중진공) 이사장은 서울 코엑스에서 패션업종 대표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한 여성의류 제조사 대표가 “백화점 납품 매출이 대부분인데 1분기 매출이 전년보다 50% 넘게 줄어 직원들이 무급휴가를 냈다”며 “운전자금이 없어 신상품 개발도 못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경영자금 대출이 급했지만, 부채가 늘고 신용등급이 떨어져 중진공이 추가 대출을 해주기 어려운 업체였다.
이 같은 기업인들의 사정을 들은 김 이사장은 우량 원청기업과 납품 계약을 체결한 업체에 계약 주문장을 담보처럼 활용해 정책자금을 지원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의류 및 섬유업체가 원청업체와 납품 계약을 해도 유동성 부족으로 제때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업체가 많은 현실을 간파한 결과였다. 그가 제시한 ‘패션업계 맞춤형 패키지 지원’은 이후 여러 의류업체가 중진공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취임식 전부터 현장 행보김 이사장은 산업통상자원부 및 한국산업기술진흥원(원장), 중소벤처기업부(차관) 등을 거친 정통 관료 출신이다. 11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자리에서 수석대표로 참여한 ‘통상 전문가’로도 꼽힌다. 전임 이사장이 총선에 출마하면서 지난 5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에 올랐다.
‘현장 경영’은 그의 경영 철학이다. 5월 19일 취임날에도 그는 오후 취임식에 앞서 경남 김해의 자동차 부품업체를 방문했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수시로 “책상에만 앉아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들의 현실을 직접 보고 현실성 있는 해결책을 마련하라”는 독려다.
그가 취임 후 전국 각지를 돌며 마련한 현장 간담회만 19차례다. 1주일에 한 번꼴이다. 그는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중진공의 업계 ‘구원투수’ 역할이 절실했기에 더 뛰었다”고 말했다.
현장에 대한 신념을 키운 건 그가 산업부에서 사무관으로 일하던 때부터다. 그가 맡은 통상 업무는 외국을 상대하는 만큼 불확실성이 큰 일이 많았다. 때론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야 하는 고된 업무였다. 김 이사장은 “업무와 관련된 기업인들을 만나면서 산업계에서 실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면 현장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해외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소기업들의 고충을 더 잘 이해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2014년 한국 수석대표(산업통상자원부 FTA정책관)로 한·베트남 FTA 협상을 할 때도 중소기업의 수출 확대에 신경을 썼다. 베트남이 자국 자동차산업 육성을 위해 완성차 수입을 꺼리고 있다는 걸 파악한 그는 한국 자동차 부품 등 중간재, 화장품 등의 관세 철폐를 요구해 원만한 협상을 이끌어냈다. 김 이사장은 “우수 중소기업의 수출 활로를 여는 게 고용 효과도 크고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2015년 FTA 협상이 타결됐고, 이후 베트남은 한국과 교역이 급증했다. 미국과 담판…원산지 규정도 바꿔1962년 충북 청주에서 2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 이사장은 중·고교 교장이었던 아버지 영향으로 자연스레 공직자로 진로를 잡았다. 학부(서울대 국제경제학) 시절부터 행정고시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대학원 진학 후 1987년에야 가까스로 합격했다. 그는 “또 낙방하면 군대에 끌려갈 처지여서 배수진을 치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대학 동기들보다 3~4년 공직 진출이 늦었지만,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를 아는 공무원들은 김 이사장이 미국에서 상무관(1994~1997년)으로 파견돼 통상 업무를 하던 때를 기억한다. 1996년 미국은 수입하는 섬유의 원산지 규정에 ‘얀 포워드 룰(Yarn Forward Rule)’을 갑자기 적용했다. 섬유, 원사, 원단, 의류 등 각 공정을 모두 한국에서 해야 한국산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김 이사장은 당시 “부당한 규정을 바꾸자”고 작심했다. 이를 위해 수출실무 사무관 한 명과 의기투합했다. 일개 사무관들이 미국과 싸우는 모습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회의적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세 차례 미국과 협상을 이끌어 냈고, 원산지 기준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국내 섬유업체들이 6000만달러의 피해 보상을 받는 성과도 올렸다. 직원들과 ‘핫라인’ 채널 소통현장을 중시하는 그는 대화도 즐기는 편이다. 공무원 시절에도 선후배나 산하 공기업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2004년 산업부 국제협력과장으로 승진하면서 그는 수시로 직원들과 주말 등산에 나서곤 했다. 지금도 그가 거쳤던 여러 부서 직원들과 결성한 등산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다.
2015년 산업부 통상교섭실장 시절에는 산업부 산하 공기업 기관들이 모이는 ‘장관배 등산대회’도 발족시켰다. 주요 산하기관이 전국 혁신도시로 뿔뿔이 흩어져 소통하기 어려운 형편을 개선하고 싶어 기획한 행사였다. 그는 “‘직원끼리도 소통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정책을 입안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10명이 한 팀을 꾸리고, 가장 마지막 팀원이 들어오는 시간을 재 순위를 정했다. 참가자들의 팀워크도 높여보자는 의도였다.
중진공 이사장 취임 이후에도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 이사장과 직원 간 ‘소통창구(핫라인)’를 만든 것도 이런 이유다. 이사장 개인 메일로 임직원의 개별 건의를 받아 경영계획 등에 반영하는 것으로, 공기업 중에선 이례적인 일이란 평가를 받았다.
김 이사장은 전국에 뻗어있는 중진공의 인프라를 활용해 ‘지역산업혁신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개별 기업을 지원하는 수준을 넘어 지역경제를 이끌 산업을 발굴하고 협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게 목표다. 그는 “중진공은 전국 32개 지역본부·지부를 두고 있는 만큼 오랜 기간 쌓인 지역 기업 및 산업 데이터가 강점”이라며 “예비 유니콘 등 지역별 대표 기업을 발굴해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 김학도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이사장
△1962년 충북 청주 출생
△청주고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1987년 행정고시 31회
△2004년 산업자원부 국제협력과장
△2009~2010년 지역발전위원회 국장
△2010~2015년 신산업정책관, 자유무역협정정책관
△2015~2017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장, 에너지자원실장
△2017~2018년 한국산업기술진흥원 원장
△2018~2020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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