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시스템반도체의 전진 생산기지로 육성할 화성 반도체 공장의 극자외선(EUV) 전용 생산라인 전경.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서기 위한 중장기 비전을 발표했다. 올해부터 2030년까지 12년 동안 133조원을 시스템 반도체(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을 첨단 연구개발(R&D) 분야 고급 인력 육성에 쓸 방침이다.
삼성이 10년 단위의 장기 비전을 내놓은 것은 2009년 이건희 회장의 ‘비전 2020’ 이후 10년 만이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일으킨 아버지처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사실상 창업을 하겠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24일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매출 기준 세계 1위를 달성하기 위한 ‘반도체 비전 2030’ 전략을 공개했다. 올해부터 2030년까지 12년간 R&D 분야에 73조원, 첨단 생산 시설에 60조원을 투자하는 내용을 담았다. 연평균 11조원 규모다. 지난해 삼성전자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R&D와 설비 투자 대비 각각 2~3배 늘어난 수준이다.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고급 인력 양성과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조성을 위한 상생 전략도 내놨다.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를 연구하는 고급 인력 1만5000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투자 등으로 인한 직·간접 고용유발효과는 4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국내 중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업체)의 반도체 설계 및 생산, 마케팅을 위한 인프라 지원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도 다음주 국내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육성 종합대책을 발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대규모 선제 투자로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린 성공 방정식을 파운드리(수탁생산)와 같은 시스템 반도체에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라며 “삼성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캐치업(1위 따라잡기)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삼성, 시스템반도체서 '제2 창업'…"133兆 중 절반 이상 사람에 투자"
경영의 달인으로 불리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들도 머뭇거리는 순간이 있다. 반도체 투자같이 수십조~수백조원의 금액이 들어가는 의사결정을 앞두고서다. 결정을 못해 ‘골든 타임’을 놓친 사례도 많다. 한때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 반도체 기업의 CEO들이 대표적이다.
삼성은 조금 달랐다. 오너의 ‘빠른 결단’이 그룹의 역사를 바꿨다. 1983년 반도체산업에 전격 진출했던 고(故) 이병철 회장이 그랬다. 1987년 이후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투자와 관련한 숱한 결단들도 삼성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려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24일 결단을 내렸다. 삼성 반도체 사업의 미래를 좌우할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사실상 ‘제2의 창업’ 선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위기의 순간에서 “실력과 노력으로 세계적 초일류 기업의 리더로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던 이 부회장의 리더십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신사업 투자 지체할 수 없어
삼성전자가 이날 내놓은 반도체 비전 2030의 핵심은 대표적인 비메모리 반도체인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 강화다. 133조원 규모의 금액을 쏟아붓기로 했다. 삼성이 주도하고 있는 D램,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퀄컴 소니 TSMC 등 전통의 강자들과 파운드리(수탁생산),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자동차용 반도체 등을 놓고 본격적으로 겨뤄보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반도체 경쟁력은 ‘반쪽짜리’라는 평가가 많았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60%에 달하는 점유율로 시장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약 7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선 모바일 AP를 제외하곤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인텔을 따라잡기 위해 20년간 중앙처리장치(CPU) 개발에 공을 들이다 결국 손을 든 것은 업계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5세대(5G) 이동통신,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과 연계된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 점점 커지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삼성 내부를 짓눌렀다. 서울대 공과대학의 한 교수는 “삼성전자가 모바일 AP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었겠지만 그 외의 시스템 반도체 시장을 보면 경쟁자보다 기술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대규모 투자는 기술력을 높이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라고 했다.
투자 1순위는 파운드리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산업 중에서도 파운드리를 1순위로 겨누고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1위 대만 TSMC보다 시장점유율(2018년 기준)이 38%포인트나 낮은 2위다. 삼성전자는 시설투자액 60조원 중 58조원을 경기 화성 극자외선(EUV) 라인 등 파운드리 경쟁력 향상에 쏟아부어 TSMC를 잡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58조원을 투자기간(12년)으로 나누면 1년에 5조원 꼴이다. 작년 삼성 시스템 반도체 투자액의 약 두 배 수준이다.
전체 투자액의 55%인 73조원을 연구개발(R&D)에 배정한 것도 이례적이다. R&D 투자는 결국 사람에 대한 투자다. 향후 12년간 1만5000명 규모 인력을 끌어 모아 5G, AI, IoT 등 초기 단계인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의 연간 R&D 투자액의 두세 배 수준”이라며 “‘고용 창출에 앞장선다’ 는 이미지를 다지겠다는 뜻도 읽힌다”고 분석했다.
세계 1위 TSMC 넘을 수 있을까
삼성이 중소기업 지원 등 ‘동반성장’ 의지를 재차 표명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삼성전자는 자체 개발한 설계 자산을 중소 팹리스(반도체설계 전문업체)들에 개방하고 설계 불량 분석 툴과 소프트웨어를 지원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계획에 일단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파운드리 시설투자에 너무 많은 돈을 쏟아붓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수도권의 한 대학 교수는 “파운드리의 수익성을 높이려면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 큰손 고객들의 주문을 늘려 받는 게 필수적”이라며 “스마트폰을 두고 경쟁하는 애플, 통신칩 분야의 경쟁자 퀄컴 등이 TSMC를 놔두고 1순위로 삼성전자를 택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좌동욱/황정수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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