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9월29일 (로이터) 이신형 기자 - 최근 한중관계를 고려할 때 다음 달 10일 만기가 도래하는 한중 통화스왑 계약의 연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하지만 대외 부문의 리스크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외환시장은 한중 통화스왑의 향배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다.
시장의 관심이 온통 북한 리스크에 쏠려 있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일본이 위안부 소녀상 문제로 한-일 통화스왑 협상 중단을 선언했을 때도 외환시장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일 통화스왑 계약이 체결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중 통화스왑이나 한호주 통화스왑이 체결했을 때도 그랬다.
지난 2008년 체결된 한미 통화스왑은 예외였다. 당시 한국 경제가 시스템 위기에 빠진 것은 아니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와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한 외국인들의 의구심이 겹치면서 외화유동성 부족 현상을 겪었다.
기축통화국인 미국과의 통화스왑은 부족한 외화유동성을 공급받는 차원을 넘어서 시장의 불안 심리를 일거에 잠재운 조치였다. 효과가 분명한 조치였기에 외환시장도 반응했다.
다른 나라들과의 통화스왑에 대해 외환시장은 일반 경제전문가들이나 언론과는 다른 반응을 보여왔다.
다른 나라와의 통화스왑이 한미 통화스왑과 달리 당장의 위기나 유동성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예방적 조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기축통화국과의 통화스왑과 다른 나라와의 통화스왑이 갖는 무게감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같은 반응의 차이는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대외건전성에 대해 끊임없는 의구심을 보이는 일부 경제 전문가들과 달리 시장은 통화스왑 계약이 아쉬울 정도로 한국의 대외건전성이 취약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가 간 통화스왑은 비용 없이 외환보유액을 확충하는 효과가 있다. 기축통화국과의 통화스왑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는 통화를 가진 선진국들과의 통화스왑도 이런 효과가 있다. 외환보유액은 보유 비용이 발생하는 반면에 통화스왑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경제 대국들과의 통화스왑은 다다익선이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 경제 대국들은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약한 나라와의 통화스왑을 거래 상대방이 필요할 때 언제든 돈을 빌려줘야 하는 일종의 경제 원조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나라들은 한국과의 통화스왑 계약에 소극적이다. 한국은 물론 많은 나라가 미국과 통화스왑을 원하지만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2008년 외에 미국은 통화스왑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다.
일본도 한국과의 통화스왑에 적극적인 적은 없었다. 이명박 정부 때 체결됐던 한일 통화스왑도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요청하면서 성사됐다. 만기 시점에서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이지 않았고, 연장 협상 없이 종료됐다.
박근혜 정부 때 한일 통화스왑 재협상 움직임이 있었으나, 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의 외교적 마찰이 증폭되자 일본은 일방적으로 협의 중단을 선언했다.
이렇듯 통화스왑은 외교적 거래의 성격이 다분하다. 한국이 경제 대국들과 통화스왑을 체결하려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한중 통화스왑도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간의 외교적 갈등에 영향을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다행히 한국은 지금 통화스왑에 매달릴 만큼 절박하지 않다. 북한 리스크가 커지고 있지만 대외건전성 지표가 양호하다. 북한 리스크 확대로 외화유동성 문제가 발생해도 혼자 힘으로 대응할 여력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
늘 듣는 얘기지만 1997년 말 약 204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액은 올해 8월 말 현재 3848억달러까지 증가했다. 경상수지 흑자는 지난해 987억달러에 달했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도 2008년 말 74%에서 2017년 6월 말 31%까지 낮아졌다. 국가신용등급도 S&P 기준 AA 등급으로 영국, 프랑스와 같은 수준이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도도 높아졌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도발을 멈추지 않고, 미국과 북한이 험악한 설전을 주고받아도 현재까지 심각한 자본유출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북한 리스크가 엄중하고 앞으로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있어 통화스왑과 같은 예방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한중 통화스왑이 종료된다면 국민적 불안 심리가 커질 소지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굳이 예방적 조치를 찾는다면 통화스왑만 있는 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돈을 빌린다고 하면 아연실색할 사람들이 많다. IMF 구제금융의 악몽을 생각하면 이해할 만하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정책감독을 받지 않고 IMF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는 신축적 공여(FCL)와 위기 예방용 단기대출(PLL) 제도가 도입됐다. 구제금융과 달리 IMF의 정책 감독을 받을 필요가 없는 긴급 유동성 지원제도다.
국가 간 통화스왑처럼 IMF와 계약만 맺고 돈이 필요할 때 인출할 수 있는 제도다. IMF 이사회의 심의를 거쳐 신청이 허용된다. FCL이 좀 더 대내외 건전성이 양호한 나라에 적용되고, PLL은 FCL 신청 자격이 안 되는 나라들이 신청할 수 있다.
멕시코와 폴란드가 IMF에 예방적 조치로 FCL을 신청하고 실제로는 돈을 빌리지 않았다.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 등과 예방적 조치로 통화스왑 계약을 체결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인출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FCL도 당연히 비용이 든다. 통화스왑과 다른 점은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돈을 인출하지 않아도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돈을 인출하면 수수료는 없어지고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금리를 지불하는 것은 통화스왑도 마찬가지다. FCL의 가장 큰 비용은 낙인효과다. 실제로는 양자 간 통화스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제도지만 이런 낙인 효과 때문에 신청하는 나라가 적었다.
특히 IMF 구제금융을 경험한 한국 정부가 IMF 대출제도에 대해 언급하는 건 여전히 금기로 남아 있다. 한국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 후 국제사회에 글로벌 금융안전망 도입을 적극적으로 제안했고, 정부의 이런 노력이 PLL이나 FCL 도입에 실제로 기여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정작 국내에서는 예방적 조치로 사용할 수 있는 이런 수단이 있다는 설명조차 속 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또 IMF 간다'거나 ‘또 IMF 가려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불안 심리를 덜어줄 수 있는 제도인데 설명할 기회도 갖기 어렵다. 불합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외건전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구심도, 국제사회가 마련한 새로운 IMF의 유동성 지원 대책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도 외환위기가 남긴 트라우마 탓이다.
쉽게 잊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다.
(편집 유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