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안에 핵심 소재·부품·장비 20개 품목 공급을 안정화하겠다는 정부 발표는 책상머리 대책에 불과하다. 당장 석 달이 문제인데….”(10대 그룹 계열 A사 부회장) “소재·부품의 전면적 국산화는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중견기업 B사 대표)
한국 간판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CEO)들이 쏟아낸 하소연이다. 한·일 경제전쟁이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기업인들이 답답해하고 있다. 정치·외교적 해법 없이 이대로 사태가 장기화하면 애먼 기업들의 피해만 커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기업인들의 우려는 한국경제신문이 13일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등 30대 그룹 계열사 CEO를 포함한 중견·중소기업 대표 67명을 대상으로 한 ‘한·일 경제전쟁 전망 및 대책’ 긴급 설문조사에서 그대로 확인됐다. 설문에 참여한 기업인 67명 중 70%가량은 ‘맹목적 국산화 계획’을 경계했다. ‘일본의 소재·부품 수출규제 대응 방안’을 묻는 말에 기업인 절반가량(52.2%)이 ‘수입처 다변화’를 꼽았다. ‘국내 협력사 발주’(16.4%)와 ‘자체 연구개발(R&D)을 통한 조달’(10.4%) 등 국산화 방침을 밝힌 기업은 26.8%에 그쳤다. 한 대기업 CEO는 “무조건 국산화만 강조하기보다는 수입처 다변화 등 종합적인 ‘공급망 안정화’ 개념으로 풀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상당수 기업인(80.6%)은 ‘1년 안에 20개 핵심 품목 공급을 안정화하겠다’는 정부 대책(8월 5일 일본 수출규제 대응 관계장관회의)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능하다’고 답한 기업인은 1.5%에 불과했다.
기업인 56.7%는 일본의 경제보복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중장기 소재·부품·장비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선 ‘화학물질관리법 등 환경규제 완화’(41.8%)와 ‘R&D 관련 세제 지원 확대’(25.4%) 등이 절실하다는 호소가 많았다.
"소재·부품 1년내 공급안정화 어려워…정부, 기업현실 너무 모른다"
“예측하기 어렵다. 대책이 없다. 잘 모르겠다.”
한국경제신문이 13일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30대 그룹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및 중견·중소기업 대표 67명을 대상으로 한 ‘한·일 경제전쟁 긴급 설문조사’에서 쏟아진 답변들이다. 평소 같으면 1~2년 뒤를 내다보고 사업계획을 짜는 CEO들이지만, 일본의 경제보복 파장과 대응책을 묻는 말에는 “알 수 없다”며 두 손을 들었다. 10대 그룹 계열사의 한 대표는 “당장 한 달 뒤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될지도 가늠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불확실성이 너무 커 어떻게 대응할지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기업인들은 한·일 경제전쟁이 내년까지 이어지는 등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정부가 잇달아 발표한 대책에 기대를 거는 CEO는 많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소재·장비 부품 국산화를 위해서는 “기업의 손발을 묶고 있는 규제 족쇄부터 풀어주는 게 우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일 경제전쟁 오래간다”
설문조사에 응한 기업인 중 절반 이상(56.7%)은 일본의 경제보복이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응답자의 17.9%는 ‘내년 하반기 이후에도 일본이 경제보복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올 3분기 말께 경제보복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예상한 CEO는 전체의 4.5%에 그쳤다. 한 대기업 CEO는 “어느 한쪽이 물러서지 않는 한 양국 갈등이 계속될 것 같다”고 했다. 설문에 참여한 중소기업 대표는 “언제 끝날지 예상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오래갈 수도 있다고 본다”고 답했다.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에 대해 경제단체의 한 임원은 “국내 기업인들이 한·일 경제전쟁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더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업인들은 정부의 대책 발표를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정부는 지난 5일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20대 핵심 품목은 1년 내 공급을 안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소재 및 부품산업을 한국의 미래 먹거리로 삼겠다는 장밋빛 청사진도 내놨다.
이런 정부의 계획에 대해 대부분의 설문 응답자는 부정적이었다. 절반 이상(50.7%)이 ‘부분적으로만 성공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29.9%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가능하다’고 본 CEO는 전체의 1.5%에 그쳤다. 제조업체의 한 CEO는 “정부가 현실을 외면하고 장밋빛 계획만 늘어놓을수록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라며 “언제까지 해결하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시급하다”고 꼬집었다.
○“기업 옭아맨 규제부터 풀어야”
기업인들은 소재 및 부품 경쟁력을 키우려면 규제부터 완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에 바라는 점을 묻는 항목에 41.8%가 ‘환경규제 완화’를 꼽았다. 연구개발(R&D) 관련 세제지원(25.4%), 정부 예산 투입(13.4%), 기초과학 육성(9.0%) 등의 답변이 뒤를 이었다.
기업인들이 완화해야 한다고 지목한 환경규제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이다. 화평법 개정안은 지난 1월부터 시행됐다. 기업들은 연간 1t 이상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화학물질을 모두 정부에 등록해야 한다. 법 개정으로 기업이 등록해야 할 물질의 종류는 500여 개에서 7000여 개로 급증했다. 화학물질을 등록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는 게 기업들의 하소연이다. 등록해야 하는 항목이 방대한 데다 일부 정보는 해외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 관계자는 “일부 중소기업은 비용 부담 탓에 새로운 소재 개발을 포기했을 정도”라고 전했다.
화관법은 화학물질을 쓰는 공장에 안전진단 의무를 부과했다. 올해 말로 유예기간이 끝나면서 법 시행(2015년 1월) 전에 지어진 공장도 배관 검사 등을 받아야 한다. 산업계에서는 검사를 받으려 생산라인을 멈춰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은 라인을 중단하고 재가동하는 데 수천억원대의 비용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창민/박상용/도병욱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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