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증권사에서 미국 주식을 거래하고 있는 4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부쩍 늘었다. 지난달 12일 새벽 3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미국 주식 주가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본 A씨. 해당 주식을 서둘러 매도하려고 했지만 해당 증권사 거래시스템 전산장애로 원하는 시간·가격대에 주식 매도에 실패하며 수천만원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A씨는 주식 매도를 위해 수 차례 애플리케이션에 로그인 접속을 시도했지만 '지금은 주문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는 메시지에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이후 해당 증권사는 당일 오전 9시 "미국 현지 통신 업체에 간헐적인 오류가 있었다"며 "당사 기준에 따라 보상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공지했지만 A씨를 포함한 투자자들의 원성과 불안감을 잠재우긴 역부족이었다.
까다로운 보상절차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피해를 증명하려면 증권사가 제시하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며 로그인 오류 화면을 이미지로 남기는 등 거래를 시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A씨는 "증권사는 보안과 접속 안정성이 보장이 돼야 하는데 이런 일을 겪으니 불안감이 들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올 들어 국내 증시가 박스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증권사 전산장애 사고가 줄을 잇고 있다. 이미 올 상반기 금융감독원이 접수한HTS(홈트레이딩시스템)·MTS(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 전산장애 신고건수는 81건으로 지난해 연간 수치인 80건을 넘어섰다.
금융감독원이 본격적으로 전산장애 신고건수를 접수한 2018년 34건 이후 해마다 늘어 2019년 47건, 2020년 49건, 2021년 60건, 2022년 66건을 기록하더니 올해엔 역대 최대치를 찍게 되는 것이다.
증권사들은 전산장애를 줄이기 위해 전산운용비를 확대하고 IT 인력을 보강하는 등 증권사들의 노력이 유명무실해졌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10대 증권사의 전산운용비는 전년동기대비 11.7% 증가한 310억원으로 증가했지만 전산장애 신고건수는 역대 최고치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잊을 만하면'이 아닌 '잊을 새 없이' 증권사 전산장애 사고가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금융당국도 대형이벤트 사전 대비, 비상대응 훈련 범위 확대, 프로그램 테스트·검증·배포 통제 강화를 골자로 한 '금융 IT 안전성 강화 가이드라인'을 시행했지만 이마저도 무색해졌다.
HTS·MTS를 포함한 증권사 서비스는 고객 자산 관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증권사에서 0.1초라도 전산 장애가 발생하면 고객들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계엄 사태 등 정치적 불안요소로 서학개미(해외 주식에 투자하는 국내 투자자들)들의 미국 주식 보관액이 지난 5일 기준 157조5873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국내 증시 이탈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전산장애는 증권사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전산 장애사고를 100% 방지하는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말 못할 사정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년 전산장애 사고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전산과 관련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과감한 투자를 통해 투자자들이 밤새며 마음 졸이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