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허는 있었지만 1986년 당시 서울엔 다른 두 가지가 없었다. 이전까지 막혔던 해외여행길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열렸다. 집안을 탈탈 털어 8000달러를 손에 쥐고 '한국에 없는 것들을 찾아오겠다'는 마음으로 스물아홉에 미국땅을 밟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뉴요커들 틈에 끼어 영어를 배울 경우 석 달이면 대충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6개월 후 주머니엔 5달러만 남았다. 영어는 한국에서와 다를 바 없었고 돈마저 바닥나니 당장 하루하루 호구지책이 깜깜했다.
손사래를 치는 형님과 누님께 판 것은 오만가지다. 도맷값에 인형을 떼왔고 양초를 한가방 메고 불쑥불쑥 내밀어 보기도 했다. 절박했으니 민폐라고 여기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게 다 경험이 됐다.
누가 뭘 필요로 하는지, 고상하게는 고객들의 수요와 필요를 깨달은 셈이다. 당시 한인들 인심이 각박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맨해튼이나 플러싱 롱아일랜드, 브룩클린 곳곳에 퍼진 디아스포라의 분포를 꿰뚫게 됐다.
하지만 그새 긴장감이 풀린 탓인지 사감 열쇠 꾸러미를 잃어버려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여기저기서 품삯을 벌기 위해 다니느라 삭신이 쑤시기 일쑤였던 어느 날 기숙사로 돌아와서 방심했던 사이 문단속을 뚫고 누군가 책상을 털어간 것이다.
공부도 쉽지 않은데 남의 나라에서 돈 벌어 학교를 다니려니 적응은 더뎠다. 하지만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변변찮은' 학교들도 재수 삼수로 들어갔던 경험이 도움됐다. 힘들 때면 자문했다. '세상일이 내게 언제 한번 쉽게 풀린 적이 있던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운명엔 꼭 변수가 있다. 금의환향은 커녕 청천벽력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묵묵히 기다리던 선친께서 아들 잘되는 것도 못보고 훌쩍 떠나신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께선 아들 잘되라고 그러셨는지 혼자선 쉽사리 감당하지 못할 빚도 남기셨다.
초상을 치르고 나서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이자율이 28%였는데 한국 월급으론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원금 근처도 못갈 것만 같았다. 상속을 포기할지도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욕되게 하긴 싫었다.
미국서 70통의 이력서를 썼다. 딱 한 곳에서만 답이 왔다. 뉴욕 뮤추얼 보험사였다. 처음엔 탐탁치 않았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성과가 좋으면 영주권도 주겠다니 더 찾고 말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3년을 일하며 보험이 천직이란 걸 깨달았다.
뭔가를 판다는 것은 영혼을 나누는 것이라고 여길 때쯤 독립했다. 뉴욕에서 좌충우돌한 지 7년 만인 1992년이었다. 누군가를 설득해 무엇을 파는 기술은 애저녁에 익혔다. 하지만 보험을 중개하면서 나를 믿어준 이의 인생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엘리트도 아니면서 뉴욕에 와서 산전수전 공중전을 거쳐 자리를 잡고 나니 이민자들의 마음을 꿰뚫은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저마다 적응 좀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이들에겐 물건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고가 났을 때 자신들 대신 나서줄 대변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상일은 잔인할 만큼 공평하다. 일터에선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었지만 그만큼 소홀했던 가정에서 빈자리가 드러났다. 31대 뉴욕한인회장을 마치고 세계한인무역협회 이사로 활동하던 2014년 1월, 큰딸이 세상을 떠났다. 밖으로 뻗는 걸 성공의 정의로 알던 아버지에게 딸은 안으로의 관심도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2021년 한인무역협회 회장을 끝으로 그는 여러 직함들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지만 속도보단 방향이다. 최근엔 한국 기업들의 미국 진출이 늘면서 사업적인 성취는 오히려 전보다 크게 늘었다. 지난 5년 사이 연 매출이 두 배가 됐고 보험 브로커리지는 물론 의료보험 설계와 자산관리까지 사업을 넓혔다.
하용화 솔로몬보험그룹 회장은 "당초 2027년까지 미국 100대 브로커가 되는 것이 사업적 목표였지만 사실 이제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임직원이나 고객들이 인정하는 기업을 만들면서 저나 회사를 크게 해준 커뮤니티에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