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가 중고나라 지분을 인수하고 중고품 거래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경쟁에 뛰어들 채비를 갖췄다. 23일 소비자들이 서울 강서구에 있는 중고나라 매장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롯데가 국내 1위 온라인 중고거래 업체인 중고나라를 인수한다. 20조원 규모로 성장한 중고거래 플랫폼을 선점하기 위한 포석이다. 바이오산업 진출에 이어 신동빈 회장의 ‘공격 DNA’가 살아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23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롯데그룹은 유진자산운용, NH투자증권-오퍼스PE(기관투자형 사모펀드)와 공동으로 중고나라 지분 95%를 인수하기로 최근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전체 거래금액은 1150억원이다. 롯데 내 투자 주체는 롯데쇼핑으로, 투자금은 200억원이다. 공동 투자자 중 롯데쇼핑만 전략적 투자자(SI)다.
롯데쇼핑은 나머지 재무적 투자자(FI)들의 지분을 인수할 권리(콜옵션)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쇼핑의 전략적 선택에 따라 언제든 중고나라의 최대주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다.
롯데쇼핑은 최근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도 뛰어들었다. 강희태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은 이날 서울 롯데빅마켓 영등포점에서 열린 제51회 롯데쇼핑 주주총회에서 “이베이코리아 인수에 충분히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IB업계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올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e커머스(전자상거래) 부문에서 열세를 만회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롯데가 G마켓, 옥션 등을 운영하는 이베이코리아(지난해 말 기준 거래액 약 20조원)를 품에 안을 경우 중고나라와 롯데온(약 7조6000억원)까지 합해 롯데의 e커머스 외형은 네이버(약 27조원), 쿠팡(약 22조원) 등을 제치고 단번 에 업계 1위에 오르게 된다.
2018년 84조원 규모였던 롯데그룹 매출은 지난해 70조원에도 못 미칠 정도로 쪼그라들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신 회장의 ‘특명’ 아래 롯데그룹은 새로운 먹거리에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18층은 신동빈 회장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바로 옆이 경영혁신실이다. 작년 8월 “롯데의 미래를 설계하라”는 신 회장의 특명을 받고 신설된 조직이다. 그룹 내 인수합병(M&A) 전략에 관한 한 전문가로 통하는 이훈기 경영전략실장의 책상 위엔 롯데가 고려 중인 신사업 목록이 즐비하다고 한다. 이 중 엄선된 것만 신 회장의 결재를 받아 즉각 실행에 옮겨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통업계에선 롯데의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 시장 진출을 다소 의아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롯데의 ‘빅 픽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으로 ‘성장 날개’롯데가 중고나라를 낙점한 가장 큰 이유는 강력한 온라인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다. 중고 플랫폼은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급성장 중이다. 2008년 4조원대에 불과했던 국내 시장 규모가 지난해 약 20조원으로 다섯 배 이상 성장했다.
해외에선 더 펄펄 날고 있다. 올해 상장 예정인 미국의 중고 플랫폼인 넥스트도어는 50억달러(약 5조6430억원, 작년 10월 기준)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일본 중고 플랫폼인 메루카리의 시가총액은 23일 기준 8조8525억원에 달한다. 주당 1500엔이던 주가가 1년 만에 5420엔으로 뛰었다.
중고 플랫폼은 페이스북 (NASDAQ:FB), 아마존, 쿠팡 등 기존 플랫폼 사업자들의 성공 방정식과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한다는 점이 매력 포인트다. 사람 간 연결과 상거래를 밖으로 확장하는 개념이 아니라 수많은 지역 거점을 기반으로 신뢰와 유대를 통해 비즈니스를 펼치는 ‘하이퍼 로컬’ 개념이다. 네이버 개발자 출신인 김용현 당근마켓 공동대표는 “중고거래뿐만 아니라 지역 상점들의 광고 플랫폼으로 확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롯데의 전략은 중고나라 인수를 통해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다. 롯데그룹이 보유한 유통 및 물류 역량을 결합하면 단숨에 중고나라의 가치를 키울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다. 예컨대 안전한 중고거래를 위해 백화점, 마트, 편의점, 영화관, 놀이동산 등 롯데의 다양한 오프라인 매장을 활용할 수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사람이 플랫폼에 많이 모이면 그 위에 얹을 사업은 무궁무진하다”며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올릴 수 있고 롯데 계열 제품을 싼값에 판매하는 유통 채널로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신동빈의 공격 DNA, 다음 행보는올초만 해도 유통업계에선 롯데그룹이 화학 중심의 성장 전략을 추진할 것으로 관측했다. 유통 부문을 책임지는 롯데쇼핑은 구조조정 등 내부 정비에 주력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지난 1월 13일 신 회장이 주재한 사장단 회의를 계기로 기류가 ‘공격 앞으로’로 확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신 회장은 업계에서 가장 먼저 실행했음에도 1위를 뺏긴 사례로 e커머스(전자상거래) 사업을 지목했다. 지난달엔 롯데온을 맡아오던 조영제 사업부 대표를 경질했다. 롯데는 1996년 롯데인터넷백화점이란 이름으로 업계 최초로 온라인 쇼핑 시장에 뛰어든 바 있다.
중고 플랫폼 진출 외에도 롯데쇼핑은 이베이코리아 인수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신세계가 쿠팡의 진격에 자극받아 적이나 다름없는 네이버와 손을 잡은 데 이어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도 나선 상황은 롯데 역시 잘 알고 있다”며 “롯데가 4월 말 또는 5월 초로 예정된 본입찰까지 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앞으로 롯데가 또 어떤 분야에 뛰어들지도 관심이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경영 환경이 급변하면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그룹 등 재계 상위 기업들이 마치 스타트업처럼 빠르게 변신 중”이라며 “롯데가 유통 화학 식품 호텔&리조트 등 전통 산업에 치중된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면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김채연/이지훈/박동휘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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