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엔저'(엔화 약세) 현상으로 꾸준히 증가하던 엔화예금 잔액이 한 달 만에 10% 이상 줄어들었다. 일본은행(BOJ)의 신중한 통화정책에 따른 원/엔 환율 상승 둔화와 연말 일본 여행 수요 증가 등이 맞물리며 엔화예금 증가세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의 엔화예금 잔액은 지난 24일 기준 9949억엔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 11월 말 1조1112억엔에서 약 1163억엔(10.5%, 930원 기준 1조816억원) 감소한 수치다.
엔화예금 잔액은 엔저 현상과 함께 불었던 엔테크(엔화+재테크) 열풍에 힘입어 지난해 9월 1조엔을 돌파한 이후 올해 6월에는 1조2929억엔까지 증가했다. 하지만 지난 8월 원/엔 환율 급등 이후 상승세가 둔화되며 감소세로 돌아섰다.
엔화예금 감소의 주요 원인은 원/엔 환율 상승이 더딘 탓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100엔당 900원을 밑돌았던 엔화 가치는 비상계엄부터 탄핵 사태까지 국내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면서 한때 970원대까지 올랐다.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원화 가치가 뚝 떨어지면서 엔화에 자금이 몰린 것이다. 또 이달 초 BOJ가 금리 인상을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시장이 퍼지면서 엔화 강세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BOJ가 트럼프발(發) 불확실성에 신중한 통화정책을 취하면서 금리 인상이 예상보다 더딜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다. 이후 지난 19일 BOJ가 금리 동결을 결정하면서 환율은 최근 920~930원대로 떨어졌다. 이에 저가 매수에 나섰던 엔테크족은 당분간 원/엔 환율 변동 폭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차익 실현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연말을 앞두고 일본 여행 수요가 증가하는 것도 엔화예금 감소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항공사들은 겨울철 일본 여행 수요가 증가함에 대비하기 위해 하계 기간 대비 일본행 항공편을 주 143회 증편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은 1~2시간 내 짧은 비행시간과 엔저로 인한 저렴한 여행 비용 덕분에 연말 여행객들에게 인기다. 이러한 요인은 예금으로 보유하던 엔화를 여행 경비로 인출하게 하며 엔화예금 감소로 이어졌다.
투자업계는 엔화의 추가 상승을 기대하는 투자자들에게 단기적으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최근 글로벌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엔화 가치의 추가 상승 여력은 크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의 강달러 기조와 일본은행의 완화적 통화정책이 지속될 가능성이 맞물리면서 엔화 강세 흐름이 이어지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25일 "경기와 물가에 중립적인 중립금리 보다도 기준금리를 낮춤으로써 완화적인 금융환경을 유지해 경제를 확실히 지원하겠다"며 추가 금리 인상 연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에 엔테크족들은 엔화만 투자하는 상품보다 미국 주요 지수까지 투자할 수 있는 상품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엔화로 미국 증시에 투자한다면 환차익을 챙기지 못하더라도 미국 주요 지수가 오르면서 손실 완충이라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 한 달 동안 국내 투자자들은 엔화로 미국 대표지수인 나스닥100지수에 투자하는 '닛코 리스티드 US 에쿼티(나스닥100) 엔화 헤지 ETF'를 약 272만달러(40억원)어치 매수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연말 해외여행 수요 증가와 엔화 상승세 둔화로 엔화예금이 감소세를 보인다"며 "불필요하게 엔화를 많이 사두는 것은 금리와 수수료 등을 감안할 때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어 원/엔 환율 변동 등을 면밀히 관찰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