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사진)가 9일 한·일 갈등에 대해 “(한·일 간 대립이 과열 양상을 보이는 만큼) 행정부는 당분간 ‘로키(low-key·신중하고 절제된 대응)’로 갈 것”을 각 부처에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정부가 서로 ‘말 폭탄’을 쏟아내며 감정 대립으로 치닫는 게 사태 해결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날 관계부처에 따르면 이 총리는 각 부처에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불러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은 최소한 오는 13일 관계장관회의 때까지 한·일 문제와 관련한 별도 브리핑도 하지 않을 방침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떠들썩하게 여론전에 나서지 말고 확실한 근거와 대응 전략을 갖고 움직이라는 게 이 총리의 뜻”이라며 “다만 한·일 양국이 본격적인 물밑 대화에 나선다는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지난 7일 공개한 수출입규제 시행세칙에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종 외 추가로 개별허가 대상 품목을 지정하지 않았고,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포토레지스트의 수출 승인도 내줬다. 8일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맞대응’에 나설 예정이었던 한국도 발표 시점을 미뤘다.
이달 하순께부터 한·일 외교당국 간 협의가 재개될 것이란 전망도 일본에서 제기됐다. 마이니치신문은 이날 일본 당국자의 발언을 인용해 “일본 정부는 광복절까지는 한국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될 것으로 보고 8월 후반부터 외교당국 간 협의를 재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日과 '말폭탄' 감정싸움 자제...정부, 외교해법 찾기 나섰나
이낙연 국무총리가 각 부처를 상대로 ‘조용하고 신중한 대응’을 주문한 것은 한·일 간 갈등이 점차 감정 대립으로 치닫는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서울 중구청이 최근 명동 광화문 등 서울시내에 일본 제품·여행 거부의 뜻을 담은 ‘노 재팬’(일본 반대) 깃발을 설치했다가 여론에 밀려 수시간 만에 철회했던 해프닝이 대표적인 사례다. 상대방을 과도하게 자극해 스스로 협상의 여지를 좁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란 게 관가의 분석이다.
정부 관계자는 “감정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확실한 근거를 갖고 움직이라는 게 이 총리의 주문”이라며 “대(對)일본 대항 조치 등과 관련한 브리핑도 당분간 가급적 자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서로 ‘말 폭탄’을 주고받던 한·일 정부는 점차 냉정을 되찾는 분위기다. 일본은 지난 7일 수출입규제 시행세칙을 공개하면서 추가 개별허가 대상 품목을 지정하지 않았다. 같은날엔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포토레지스트 수출도 허가했다. 한국 정부 역시 8일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하지 않고 일단 연기했다.
여당 일각에서도 일본과의 확전을 부담스러워하는 기류가 감지된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세균 ‘소재·부품·장비·인력 발전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감정적 처방보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자세로 대안을 제시하고 국민의 단합된 힘을 모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미국도 물밑에서 한·일 양국 중재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관계자는 “미국이 한·일 사이에서 일정 역할을 하고 있어 일단 기다려보자는 판단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양국 정부가 ‘신중 모드’에 들어간 모양새지만 적극적인 물밑 대화를 시도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관측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일본이 뒤늦게 수출규제 품목 하나를 승인한 것을 진정한 태도 변화로 볼 수 없다”며 “삽으로 맞을 걸 망치로 맞았다고 해서 안 아픈 건 아니지 않냐”고 했다. 그는 “일본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 연기를 한국 정부의 화해 제스처로 보는 것도 무리한 해석”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한·일 정부가 이달 하순께부터 외교당국 간 협의를 할 전망이란 보도가 일본에서 나오고 있다. NHK가 이달 21일께 중국에서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보도한 데 이어 마이니치신문도 9일 “이달 하순께부터 한·일 외교당국 협의가 재개될 것”이라고 썼다. 일본 외교가에선 한·일 간 외교부 고위급 회담이 검토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조재길 기자/도쿄=김동욱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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