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형 랩은 증권사들이 고객 자산을 회사채, 기업어음(CP) 등 상품에 투자해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자산관리 서비스다. 통상 법인 고객이 3~6개월의 단기로 목돈을 굴리기 위해 활용한다. 단기에 맞춰 자금을 운용해야 하지만 증권사들은 랩 자금으로 만기가 불일치하는 고위험 채권 등을 사들인 뒤 만기가 돌아오면 다른 증권사에 해당 채권을 팔거나 자체 자금으로 사들이는 방식으로 랩을 운영했다.
문제는 지난해 9월28일 레고랜드 사태로 드러났다. 당시 CP 금리는 연 5%대로 올라섰고 증권사들은 머니마켓랩(MMW)·특정금전신탁(MMT)의 환매 중단을 선언했다. CP 금리 급등으로 채권 가격이 폭락하면서 수익률을 맞추기 어렵게 되자 고객에게 환매 중단 소식을 알린 것이다.
실제 KB증권은 '3개월짜리 안전 자산에 투자하겠다'고 안내한 법인 고객 자금을 만기 1·3년 여신전문금융채(신용카드사·캐피털사 등이 발행한 채권) 등에 투자했고 만기가 도래했거나 환매(중도 해지)를 요청한 고객에게 새 고객에게 받은 자금을 내주는 돌려막기식 영업을 했다.
시중금리가 치솟으면서 법인 고객 자금으로 투자했던 장기채 가격이 폭락했고 평가손실 900억원을 기록했다. 이에 KB증권은 하나증권에 있는 신탁계정을 이용해 법인 고객 계좌에 있던 장기채를 평가손실 이전 장부가로 사들여 손실을 메웠다. 금융당국은 KB·하나증권 행각이 중대한 모럴해저드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자본시장법 위반 여부를 조사 중이다.
자본시장법 제99조 시행령에 따르면 ▲수익자 요구에 따라 동일한 수익자의 투자일임 재산 간 거래의 경우 ▲동일한 수익자의 서로 다른 계좌(금융사) 간 매매 시 ▲수익자 이익을 해칠 염려가 없을 때 등에 한해 자전거래를 예외적으로 허용한다. 두 증권사는 채권 파킹을 통한 자전거래가 '수익자인 고객의 유동성 공급 요구에 의한 것'이며 '동일 수익자의 서로 다른 계좌 간 거래'이므로 절차적 하자가 없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영업한 NH투자증권은 채권형 랩의 손실이 확정된 일부 고객에게 자발적 배상에 나섰지만 다른 증권사의 배상이 이어질지 미지수다. 법적 책임 없이 투자자들에게 돈을 물어 줬다가 자칫 배임 논란으로 번질 수 있어서다. NH투자증권의 채권형 랩·신탁 규모는 9조~10조원, 손실액 규모는 180억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어설픈 자본시장법 속에 증권사의 고질적인 관행은 자본시장의 혼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에선 증권사가 미스매칭 투자를 할 때는 사전에 고객 동의를 받고 그대로 이행하도록 내부통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금융당국이 증권사의 만기 미스매칭·자전거래 관행에 메스를 댄 만큼 고객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자본시장 구축이 요구된다. 증권사 '채권 돌려막기' 관행으로 수백억원의 손해를 보는 고객이 생기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