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는 대표적인 형제 경영 기업이다. 형인 최종건 창업회장은 선경직물을 세우고 기틀을 다졌고 동생인 최종현 선대회장은 회사의 질적 도약을 끌어냈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선경직물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한 것은 해방을 얼마 앞두지 않은 1944년 4월이었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조선인이라는 조건에도 입사 반년만에 선경직물공장 직포반 제2조장이 됐다. 그는 백여명의 제직조 여공들을 통솔하며 생산과 품질을 책임졌다.
최종건 창업회장은 자신의 사업을 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1949년 선경직물공장을 떠났다. 그는 6∙25동란중 잿더미로 변한 선경직물공장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고 1953년 선경직물을 불하받아 창업의 꿈을 실현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품질 제일 주의' 원칙으로 사업을 키워나갔다.
선경은 빠르게 성장해 1968년 아세테이트공장, 폴리에스텔 원사공장이 첫 삽을 떴다. 두 공장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시각도 많았지만 선경은 선경합섬과 선경화섬을 설립하며 성공적으로 공장을 완공했다. 최종건 창업회장의 불같은 추진력과 최종현 선대회장의 뛰어난 지략이 시너지를 발휘한 결과였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세상을 떠나고 글로벌 경제 위기가 찾아왔다. 제1차오일쇼크로 전 세계가 침체 국면을 맞으면서 선경도 영향권에 들었다.
1973년 최종현 선대회장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경을 세계 일류 화학, 에너지 회사로 키우겠다고 천명했다. 섬유회사를 넘어 원유 정제,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을 인수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해외 유전 개발로 한국을 놀라게 했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해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지만 특혜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당시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고 직원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2년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원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지만 최종현 선대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최태원 회장은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을 확장, 발전시켰다. 최종현 선대회장은 대형화∙세계화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 주먹구구식 경영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SK의 경영철학과 목표, 경영방법론을 통일되게 정의하고 업무에 똑같이 적용할 수 있도록 1979년 SK경영관리시스템(SK Management System)을 정립했다.
최태원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점찍고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는 내부 구성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KS:000660)) 인수를 강행해 회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키워냈다. SK하이닉스는 출범 바로 다음해인 2013년 세계 최초로 HBM(고대역폭메모리)을 선보인 후 꾸준히 세계 최고 수준의 신제품을 개발, 양산하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11월 '2024 CEO세미나'에서 "SK가 보유한 기술력 그리고 그룹 계열사 간 또는 외부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가장 싸고 우수한 AI 데이터센터(DC)를 만들어 그룹 AI 사업을 글로벌 스케일로 확장해야 한다"며 "과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거시(Macro) 환경 변화를 잘 보고, 사별 특성에 맞게 사업환경 예측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