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5월20일 (로이터) - "체육부에게 문화부 일을 시킬 수는 없지 않습니까?"
2016년 4월~5월 한국은행의 발권력 동원 논란이 한창일 때 한은의 한 직원이 세태를 한탄하면서 했던 말이다.
조선·해운업 등의 구조조정이 한국경제 최대 현안이 된 뒤 한은은 정부와 정책 보조를 맞출 것이란 입장을 밝혔으며 정부는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에 한은이 자본금을 확충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많은 한은 사람들은 정부가 재정으로 해야 할 일을 손쉬운 발권력 동원을 통해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물론 그들은 이 말을 할 때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 조심스러워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구조조정, 재정보강에 중앙은행도 어떤 식으로든 힘을 보태주기로 '약속한' 마당에 한은은 정부와 힘의 대척점에 서는 것처럼 비치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4월 금리결정회의(상반월 금통위)에서 지금은 통화정책이 재정정책, 구조조정과 같이 갈 때만 경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한은 사람들 외에도 체육부가 해야 할 일을 문화부 장관에게 시켜선 안된다는 점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발권력 동원이 편법이라면서 정공법으로 돌파하라는 주문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국가경제가 큰 위기에 처하지 않은 이상 편법이 아닌 정공법이 우선이다.
▲ 양방향 루트 vs 일방향 루트
한국은행은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힘, 즉 발권력을 갖고 있다. 가장 좁은 의미의 발권은 한은 대차대조표(재무상태표)에 '화폐발행'으로 잡힌다.
한데 2016년 상반기에 정부는 한은이 돈을 찍어 내는 힘을 갖고 있으니 이를 통해 구조조정에 힘을 보태주기를 원했다.
이후 한은이 화폐를 발행해서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의 자본금을 확충해주는 게 옳으냐를 두고 오랜기간 논란이 이어졌다.
이 문제를 보는 관점은 우선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라는 큰 그림에서 접근하는 게 일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살림, 즉 재정은 기본적으로 세금을 걷어 이를 필요한 곳에 쓰는 식으로 이뤄진다. 세수를 기반으로 세출을 하는 것이다.
세수가 부족할 때엔 추가경정예산 편성이나 적자국채 발행을 통해 복지정책, SOC 투자 등 '나라 살림'을 하게 된다. 부족분에 대해선 이후에 세수로 충당하게 된다. 그런데 정부가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으니 나라 살림을 함부로 할 수 없게 하는 제동장치가 마련돼 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거쳐서 국채발행한도, 즉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한도를 정하게 된다. 국민의 대표기관이 나서서 대통령이나 행정부가 맘 대로 나라 돈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세입과 세출에 대해선 국민의 대표기관이 국회가 통제를 하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선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발권력 '동원'은 한은이 화폐 발행을 통해 경기부양 등에 나서는 것으로 이런 과정이 없다. 재정정책엔 통제장치가 눈에 보이지만, 한은 동원에 그런 통제장치가 잘 안 보인다.
재정정책은 '들어올 것과 나갈 것'이 감안된 양방향 행위, 통화정책은 들어오는 것 없이 '나가는 것'에 치중한 일방적 성격이 짙은 독점적 행위다. 대차대조표의 부채와 자산 항목이 잘 매치되지 않으면 위험하다.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서 특정 행위를 하는 것은 그 만큼 조심스럽게 봐야 한다. 한은이 슬그머니 발권력을 행사해서 산업은행의 자본금은 늘려준다면 그 돈은 뭔가? 사실상 눈에 잘 안 보이는 세금일 뿐이다.
▲ '동원'의 위험성
국회의원은 국민이 선출하는 반면 중앙은행맨은 국민이 선출하지 않는다. 이처럼 중앙은행에 대한 국민적 통제장치가 미약하다보니 중앙은행엔 '독립성·중립성과 함께 책임감'이 요구된다.
중앙은행이 취하는 행위의 자율성은 독립성의 기반 위에 놓여 있다. 한은은 자기규율(self-discipline)을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한다. 이게 무너진 상태에서 이뤄지는 한은의 화폐공급 행위는 위험하다.
한은은 온갖 종류의 발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예컨대 시중은행을 도관으로 역량있는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금융중개지원대출, 공개시장조작(운용), 외환시장 개입 등이 모두 발권력을 동원(활용)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은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는 대부분 발권력을 통해 이뤄진다. 한은이 금리를 내릴 때 시장 금리가 내려간다. 이는 민간의 화폐수요가 늘어날 것, 즉 한은이 발권력이 행사될 것을 '기대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한은이 통상적으로 행하는 발권력 행사에 '동원'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뭔가 찜찜해진다. 사실 많은 한은의 행위들이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인데, 이상하게 '동원'이라는 말이 붙으면 한번쯤 눈을 비비고 보게 된다.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논란이 될 때는 통상적인 발권력 동원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원이란 단어가 한은의 자기규율에 의한 행위가 아닌 누군가의 압력에 의한 행위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발권력 '동원'이 문제가 될 때 이를 '최소화 하도록' 사회적 합의를 해 놓았다. 한은이 '통상적으로' 하는 발권 행위 외에 국책은행 출자 등에 제한을 걸어놓은 것은 '동원'의 부적절함 때문이다.
한은이 인수할 수 있는 채권을 국채, 정부보증채로 제한해 놓은 것 역시 엉뚱한 일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발권에 있어서 그 만큼 신중하라는 이야기다.
현행법이나 정부와 한은의 분업이라는 기본 소임을 감안할 때 구조조정에 필요한 돈을 국회를 거쳐 재정으로 마련하고 한은은 구조조정으로 금융시장이 흔들릴 경우를 대비하는 게 옳다.
▲ 무차별적 행위와 차별적 행위
중앙은행이 하는 대표적인 정책이 기준금리 조절이다. 기준금리를 올리거나 내리게 되면 특정 분야에 '사정을 봐주지 않고' 영향을 준다. 이른바 무차별적인 영향이 행사되는 것이다.
즉 금리를 올리거나 내리게 되면 무차별적인 영향이 행사되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중앙은행에 특정 분야를 지원하라는 훈수는 전통적인 중앙은행이 갖고 있던 가치를 무시하라는 얘기가 된다.
반면 재정정책은 특정 분야를 타게팅한다. 나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SOC 투자나 인프라구축, 미래 먹거리 산업 지원 등 국가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분야에 돈을 쓰게 된다. 국민 복지 등엔 가장 큰 돈이 들어간다.
그러면 중앙은행은 전혀 '차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중앙은행의 차별적인 행위도 있다.
한은의 정책 가운데 금리결정과 함께 가장 대중성이 높은 금융중개지원대출(舊총액한도대출)이 차별적인 행위다.
무차별해야 하는 한은의 이런 일탈행위(?)는 왜 납득이 될까. 금융중개지원대출은 한은이 유망 중소기업이나 수출기업 등에 낮은 이자로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한은이 직접 돈을 주는 게 아니라 은행을 거친다.
사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총액한도대출을 최대한 줄이거나 없애야 한다는 얘기도 많았다. 이미 '정책금융'의 시대는 지났고 시장의 자율이 강조되는 시대에 총액한도대출이 역사의 유물이 돼야 한다는 논리가 득세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한은은 사상 최대로 금융중개지원대출 대출한도를 늘려 이 제도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은행이 과거부터 해왔던 대표적인 '신용정책'이었던 데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현실론(성장성 있는 유망기업을 그냥 놔두면 망할 수 있다),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싹을 키운다는 의미 등이 있었다. 예컨대 자금력이 부족하지만 기술이 뛰어난 창업기업에 낮은 이자로 대출을 해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 구조조정, 중앙은행이 직접 할 일 아니다
그러면 2016년 한국경제에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는 구조조정과 한은의 참여에 대해 얘기를 해 보자. 일단 정부에서 한은에게 요구했던 소임은 국책은행을 도와 조선·해운 등 위기에 빠진 기업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한데 한은은 일반적으로 기업과 직접 거래하지 않는다. 한은은 은행의 은행이다. 따라서 이 일과 관련해선 국책은행의 건강상태를 살펴봐야 한다.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이 부실기업을 떠 안거나 부실대출을 늘림에 따라 이들의 재무건전성이 크게 악화될 수 있다고 한다. 이 국책은행들에 자본금을 확충해 BIS자기자본비율을 높여한다는 얘기들을 한다.
예컨대 수은은 자기자본비율이 10% 수준으로 전 은행을 통틀어 가장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수조원을 자금을 공급해서 그 비율은 14%까지 올려야한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정부 사람들은 이 국책은행들의 자본금을 메워주는 데 한은이 나서야 한다고 강변했다. 마음씨가 좀더 좋은 사람들은 재정당국(정부)과 통화당국(한은)이 같이 이 돈을 분담하자고 한다.
법상으로 한은은 산업은행에 출자를 못하게 돼 있으며 수출입은행엔 출자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출자를 해서 해운·조선업체를 비롯한 힘든 산업분야의 구조조정을 돕자고 한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구조조정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법조문은 찾기 어렵다. 법 대로 라면 중앙은행은 물가와 금융안정이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은행이 어려워지니 이 또한 금융안정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한은이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조항은 들먹이면서 한은의 지원을 합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미의 가지를 펼치다 보면 끝이 없다.
법 해석의 범위는 냉정해야 한다. 그리고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정부가 조선사·해운사 등의 구조조정과 관련해 처음부터 한은에 자본금을 대라든지 산금채같은 채권을 인수하라고 한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구조조정에 얼마나 돈이 들 것인지,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해 한은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지 '먼저' 논의하는 게 정석이었다. 상황 판단도 하기 전에 한은 돈을 쓰면 되겠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사실 좀 몰상식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재정의 역할이다. 한은은 최종대부처(last resort)로서 금융시스템 붕괴시 투입되는 '최후의 구원투수'다. 경기가 한참 남은 와중에 최강 마무리 투수를 소진해버리면 그 경기는 이기기 어렵다. 펜넌트 레이스를 이런 식으로 운영해선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다.
한은의 통화정책 담당 부총재보(이사)가 했던 '구조조정은 재정이 할 일'이라는 해서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그 관점은 기본적으로 옳다.
작금의 사태는 정부의 부실한 국책은행 관리, 정부의 입김에 휘둘리는 국책은행의 부실한 구조조정 등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일어난 측면이 크다. 정부가 구조조정을 미룬 대가를 지금 치르는 마당이다. 이런 상황에선 재정투입이 우선돼야 한다.
▲ 정부의 돈과 한은의 돈
민주주의 원칙상 정부도 한은도 모두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돈보다 한은의 돈을 쓰면 유리한 것인가.
정부 사람들은 국가의 재정, 즉 나라 곳간 사정이 좋지 않으니 중앙은행이 도와야 할 때라고 한다. 즉 국가부채가 늘어 정부의 사정이 안 좋으니 한은이 좀 나서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선 직관적으로 보자. 정부가 세금이나 국채발행을 통해 돈을 마련하는 것은 경제에 안 좋고 한은이 돈을 찍어서 자금을 마련하면 문제가 없는 것인가.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일은 없다.
한은이 발권력을 통해 특정 분야를 도와주게 되면 다른 분야는 그 만큼 손해(!)를 보게 될 수 있다. 국민경제 전체 차원에선 다른 섹터가 한은 때문에 기회비용을 치러야 하는 셈이 된다. 한은을 활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금을 활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부나 정부의 관점을 지지한 사람들이 했던 얘기는 이렇다. 한은이 난항에 빠진 국책은행에 자본금을 확충(한은이 국책은행 주식을 사서 돈을 마련해준다는 의미다)해 주면 정부의 재정 상태도 나빠지지 않고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는 더딘 일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한은이 돈만 만들어 주면 간단해 해결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 다시 얘기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흔히 얘기하는 한은의 공개시장조작(운용)이 정부의 곳간과 연결된 지점을 파악해 보자. 현재 기준금리는 1.5%다. 한은이 본원통화 공급을 확대하면 유동성이 풀리기 때문에 금리를 현재의 수준에서 유지하기 위해 국책은행에 지원한 돈 만큼을 다시 흡수해야 한다. 시중 유동성을 흡수해서 금리를 '기준'에 다시 맞춰야 하는 것이다.
한은은 통안증권 발행, 환매조건부증권 매각, 통화안정계정예치금 확대 등의 수단을 통해 유동성을 다시 흡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은은 통안증권을 산 투자자 등에게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
한은은 법적으로 이익의 30%를 자체 적립하고 나머지는 정부에 줘야 한다. 결국 위의 과정을 거치면 정부의 세외수입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 부분은 쉽게 간파되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연결지점이다.
아무튼 정부가 세금 등을 올리지 않으려고 용을 써 보지만, 결국 어떤 식이든 국민전체가 세금을 더 내야 하는 모양새가 되고 만다.
정부의 돈이든 한은의 돈이든 모두 국민의 돈이다. 원칙적으로 다른 주머니를 찬다고 특별히 더 좋아지지 않는다.
한은이 국책은행의 자본금을 늘려줬다고 해보자. 이런 발권 '동원' 행위는 본원통화 증가의 의미를 가진다. 지원 분야를 제외한 부분은 화폐가치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1을 위해 나머지 9가 나름대로의 손해를 받아들이는 구도다. 이런 부분에 대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가.
한편 발권을 남발할 경우하고 특정분야의 과잉대출을 유도할 경우 신용창출을 통해 물가상승이 일어나 국민 전체가 인플레이션 택스, 즉 사실상 세금을 물어야 하는 지경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인플레이션 사례를 보면서 발권의 조심성을 대뇌이기도 한다. 독일은 전쟁 배상금 마련을 위해 화폐를 마구 발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물가가 폭등했다. 1923년엔 1년 사이에 물가가 1600만배나 뛰어오르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은 땔감으로 나무 대신 돈뭉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런 사태는 독재자 히틀러를 등장시켰다. 동시에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가 화폐가치 안정, 즉 물가안정을 지고지순한 가치로 여길 수밖에 없는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당장 물가가 낮아서 걱정인데 무슨 헛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기본 구도를 망각해선 안 된다.
(계속)
(taemin.ch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