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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동안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을 거부해 온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현지 법원의 판결이었다. 지난해 8월 미국 연방항소법원은 SEC에 자산운용사 그레이스케일이 신청한 비트코인 현물 ETF의 상장 여부를 재심사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앞서 한 차례 SEC로부터 비트코인 ETF 상장을 반려당했던 그레이스케일이 승리를 거둔 판결이자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이 급물살을 탄 순간이었다. 이미 그레이스케일의 승소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던 블랙록 등 주요 자산운용사들은 판결 한 달 전부터 비트코인 현물 ETF 신청서를 제출했다.
SEC가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을 승인하면서 가상자산 시장에는 상당한 규모의 신규 투자 자금이 유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가입해 계좌를 열지 않아도 가상자산에 간접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기관투자가의 경우 금융 당국의 규제를 받는 ETF를 통해 투자한다면 비트코인 직접투자·보유에 따른 부담을 덜 수 있다. 김재원 쟁글 리서치팀장은 “비트코인 현물 ETF는 기관투자가가 별도 프라이빗 키를 보유하지 않아도 되며 자산운용사가 가상자산 거래소와 감시 공유 계약을 맺기 때문에 해킹·도난에 대한 위험성이 현저히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ETF를 통해 비트코인을 주식처럼 손쉽게 거래할 수 있게 돼 개인투자자의 접근성도 크게 개선된다. 가상자산 투자가 제한된 퇴직연금 계좌의 자금도 가상자산으로 유입될 길이 열렸다. 김 팀장은 “미국 내 개인 퇴직 연금 계정(IRA)과 기업 연금 계정(401K) 자금의 총 규모는 약 22조 달러”라며 “이 중 비트코인 ETF 비중을 0.5%만 잡아도 1000억 달러의 자금 유입을 예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트코인 현물 ETF를 출시하는 미국 내 운용사들도 경쟁적으로 거래 수수료를 낮추며 투자자 확보에 나서고 있다. 가장 낮은 수수료를 책정한 것은 비트와이즈다. 비트와이즈는 수수료를 0.2%로 대폭 낮춘 데 그치지 않고 거래 시작 후 첫 6개월 또는 펀드 운용 규모가 10억 달러를 달성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수수료를 면제하기로 했다. 블랙록 또한 수수료를 0.3%로 책정하고 거래 시작 후 첫 12개월 또는 펀드 운용 규모가 50억 달러를 돌파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0.2%로 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비트코인 현물 ETF 덕분에 가상자산 시장에 유입되는 자금이 2250억 달러(약 300조 원)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암호화폐의 거물’로 손꼽히는 마이크 노보그라츠 갤럭시디지털 최고경영자(CEO)는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 계정을 통해 “'부의 대이동'이 진행되고 있다”며 “가상자산 투자 규모가 베이비붐 세대보다 큰 밀레니엄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상자산 시장에 더 많은 자금이 유입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석문 코빗 리서치센터장도 “현물 ETF 출시 1년 내로 최소 200억 달러(약 26조 원)가 유입돼 비트코인 가격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아직까지 가상자산 시장의 변동성이 큰 만큼 경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투자 은행 번스타인은 “비트코인 가격이 올해 신고점을 경신하고 2025년에는 최대 15만 달러(약 2억 원)까지 상승할 것”이라며 “전통 시장에서 가상자산으로 자본이 대거 유입되는 전례 없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가상자산에 대한 의구심을 내비치는 SEC, 이더리움 현물 ETF 상장까지의 진통 등을 근거로 한 비관론도 여전하다. 현물 ETF 상장, 반감기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이미 비트코인 가격에 반영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21셰어즈의 공동 설립자인 오펠리아 스나이더는 “비트코인 현물 ETF가 상장한 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는 데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