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 진출한 한국계 은행 지점과 현지법인이 송금·대출 등 핵심 업무를 줄줄이 중단하고 있다. 미 금융당국의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준법감시) 강화 요구를 견디지 못해서다. 수백억원을 들여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수익성을 생각하면 영업 축소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게다가 미 정부가 국내 은행에 직접 ‘대북제재 준수’를 경고하는 등 감시가 심해져 리스크가 있는 업무 자체를 그만두려는 분위기다. 글로벌 금융 중심지 뉴욕에서 한국계 은행들은 연락사무소로 전락하고 있다.
5일 뉴욕과 국내 금융업계에 따르면 농협은행 뉴욕지점은 지난해 말 자금세탁방지(AML) 시스템 미비를 이유로 뉴욕 금융감독청(DFS)으로부터 1100만달러(약 123억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은 뒤 개인송금과 대출 영업 확대를 중단했다. 2016년 초 DFS와 서면합의를 맺은 기업은행도 송금과 대출 영업을 하지 않고 있다. 작년 6월 동의명령을 받은 신한아메리카은행은 작년 말부터 송금 업무를 HSBC 등 현지 은행에 외주를 맡겼다. 다른 은행 지점 두 곳도 개인 송금을 외주를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뉴욕에서 영업 중인 한국계 은행은 국민·신한·KEB하나·우리·기업·농협은행 등 시중은행과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있다. 이 은행들이 줄줄이 송금 업무를 중단하려는 건 송금이 AML 핵심 대상이어서다. 송금 업무를 하려면 미 금융당국이 요구하는 ‘고객을 알아라(Know Your Customer)’는 원칙에 따라 모든 거래에서 고객 신분을 확인하고 거래 종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또 테러단체 등의 불법자금 차명거래 등으로 합법거래를 위장했을 때 걸러내고 수상하면 미 금융당국에 신고하는 시스템도 구축해야 한다.
건당 2만원가량 버는 송금을 하는 데 수천만달러짜리 시스템을 갖추고 컴플라이언스 인력을 대거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기업은행은 2016년부터 AML 관련 컨설팅과 시스템 구축, 준법감시 인력 고용 등에 1000만달러 이상을 썼다. 현재 뉴욕지점 인력 23명 중 3분의 1가량인 7명이 컴플라이언스 인력이다.
이렇게 해도 미 금융당국을 만족시키지 못해 농협처럼 엄청난 과태료를 맞을 수 있다. 미 금융당국은 매년 감사를 통해 각 은행이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지 살펴본다. 개선할 점이 있으면 수정 조치를 요구하고 때로는 과태료를 부과해 컴플라이언스 시스템을 갖추도록 강제한다. 2014년 프랑스 BNP파리바 뉴욕지점이 89억달러를 부과받아 기록을 세웠고 지난해 대만 메가뱅크(1억8000만달러), 파키스탄 하비브뱅크(2억2500만달러) 등도 제재를 받았다. 지난달 아랍에미리트(UAE)의 마시렉은행도 과태료 4000만달러를 부과받았다. 은행 관계자는 “송금을 잘못했다가 AML을 위반하면 뉴욕 지점의 핵심 기능인 달러 클리어링(청산결제) 업무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계 은행들이 대출 확대를 중단한 건 이런 준법감시 업무에 모든 힘을 집중하느라 여력이 없어서다. 뉴욕의 한국계 은행 지점들은 △달러 클리어링(청산결제) △송금 △대출 등 기업금융 등이 주요 업무다. 자금 운용은 2010년 볼커룰(위험투자 제한이 핵심)로 인해 불가능해졌고, 투자금융 업무는 일부 은행이 처음 시도하는 단계다. 이런 상황에서 송금, 대출 등을 중단할 경우 사실상 연락사무소 수준으로 축소될 판이다.
게다가 최근 미 금융당국은 한국계 은행들을 주시하고 있다. 지난 9월 미 재무부가 이례적으로 각 은행에 직접 연락해 대북 제재 준수를 경고하면서 뉴욕의 한국계 은행들은 모두 얼어붙었다. 뉴욕의 한국계 은행의 한 핵심 관계자는 “한국계 은행들이 미 정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된 느낌”이라며 “잘못 걸리면 아예 뉴욕지점 문을 닫아야 할 판이라 최대한 보수적으로 지점을 운영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안상미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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