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16일 “단기적인 경기 부양에 치우친 재정 정책은 위험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열린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온 “지금은 재정의 과감한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과 정반대 주장이었다. 파장은 컸다. 회의 결과보다 보고서가 먼저 발표됐는데도 “보수 학자들이 정치적인 의도로 (대통령 발언 당일 정반대) 얘기를 했다”는 근거 없는 비난에 시달렸다.
최근 KDI가 정부 정책에 비판적인 보고서를 내놓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책연구기관을 총괄하는 국무총리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성경륭)이 현 정부 들어 상근직으로 바뀌면서 산하 기관에 대한 인사와 예산 통제권이 강해졌다. 그 결과 상당수 국책연구기관의 ‘코드 맞추기’는 과거보다 심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KDI는 ‘할 말은 하는’ 싱크탱크로 주목받고 있다.
KDI 홀로 ‘독야청청’
KDI는 정규직 연구인력만 345명인 국내 대표 싱크탱크다. 무기계약직과 비정규직 인력까지 합하면 그 수는 433명으로 늘어난다. 고급 두뇌들이 선망하고 연구기관 1순위로 꼽히며 구성원들의 자부심도 크다. 보고서를 발표하기 전 사내 게시판에 올려 혹독한 검증을 받는 ‘레프리(심판) 제도’ 등 연구의 중립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도 잘 마련돼 있다는 평가다. 한 KDI 출신 인사는 “연구자의 지위가 대체로 안정적인 데다 치열한 내부 토론 과정을 거치다 보니 연구에 외부 영향을 덜 받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KDI가 정부 눈치를 보지 않고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는 배경이다. KDI가 정부의 ‘장밋빛 경제전망’에 번번이 각을 세우는 게 대표적이다. 기재부는 지난 4월 발표한 ‘3월 최근경제동향(그린북)’에서 “주요 경제지표들이 개선되는 등 긍정적 모멘텀이 있다”며 낙관론을 제시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판단”이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은 기재부는 다시 “하방 리스크가 확대되고 있다”며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KDI는 매달 발표하는 경제동향에서 “경기가 점차 부진해지고 있다”는 의견을 꿋꿋이 고수했다.
연구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최정표 원장의 성향 덕분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는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시절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활동하면서 재벌개혁론을 주장해온 진보 성향 인사로 분류된다. 하지만 최 원장은 지난해 4월 취임 이후 불필요한 회의를 최소화하고 연구자들의 자율성과 시간을 최대한 보장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KDI 관계자는 “진보 성향 인사가 온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최 원장 취임 후 일절 연구 주제나 결과에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고 전했다.
다른 연구기관들은 침묵
KDI가 돋보이는 것은 상당수 연구기관이 침묵하거나 친정부 성향의 연구 결과만 내놓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어서다. KDI보다 경제학 박사를 더 많이 두고 있는 한국은행은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 대부분 경제 현안에 침묵하고 있다. 치열한 논쟁을 피해 혼자 절간에 앉아 있다는 의미에서 ‘한은사(韓銀寺)’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국내 최고 권위의 연구기관이 가장 중요한 현안인 소득주도성장 등에 대한 연구도 내놓지 않는다”(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는 등의 지적이 쏟아졌지만 바뀐 건 없었다.
민간 연구기관조차 정부 눈치를 살피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난달 22일 금융권 3대 연구원인 금융연구원·자본시장연구원·보험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문재인 금융정책 전반에 대한 평가와 과제’ 토론회가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대목이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게 충격적”이라고 전했다. 이들 연구원은 인사와 예산 등에선 사실상 금융위원회 통제를 받고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재벌 경제구조 개혁 없이는 소득주도성장 효과 못 내"
정부도 성장둔화 우려…금리인하 시그널 나올까
'소주성 2년' 쪼그라든 가계살림…'소비에 쓸 돈' 10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