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다운> 대니 돌링 지음, 김필규 옮김, 지식의날개 펴냄.
저자는 19세기 중반 이후 160년 동안 인류가 경험한 ‘대가속의 시대(the Great Acceleration)’가 종말을 맞고 있다고 주장한다.
총량은 여전히 증가하고 있지만 그 증가 속도는 예전만 못한, ‘감속(슬로다운, Slowdown)’이 여러 분야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감속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저출산·저성장 체제가 굳어지면서 자본주의 체제는 감속의 시대에 돌입했다.
슬로다운 현상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세계 인구 숫자부터 그간의 급증세를 접었다. 각국의 출산율은 가파르게 하강하고 있다.
GDP, 임금, 주식 등 경제 지표에서도 증가 속도가 둔화되고 있다. 부채 증가율은 미국에서조차 한 풀 꺾였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 속도도 과거보다 떨어졌다.
과학기술의 발전 속도도 크게 저하됐다. 전기, 전화기, 세탁기 등은 처음 등장했을 때 인류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기술 혁신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 진보의 속도 역시 떨어지고 있다. 세계 최장수 기록은 지난 20년간 갱신되지 않고 있다. 10년마다 1㎝씩 늘던 유럽인의 평균 신장도 정점을 찍고 내리막이다. 한국인의 평균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
위키피디아의 경우 2007년 이미 다룰 만한 주제어들이 다 등록되었으며, 이후로는 사소한 것을 다룬 문서들만 증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 130년 동안 인류는 이렇다 할 새로운 ‘주의(이즘, ism)’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다.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조차도 이미 오래된 개념이다.
새로운 용어처럼 들리지만, 사실 ‘페미니즘’이라는 개념도 1880년대에 등장한 것이다. 환경 변화로 인해 지구의 평균 기온만이 계속 오르고 있다.
언뜻 보면,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거대한 인류사를 돌아봤을 때 급속한 성장과 발전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가속 시대 이전,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아주 느리게 살아왔고 수백 년에 걸쳐 비슷한 삶의 방식을 지속했다.
저자는 감속에 대해 순진하다고 할 만큼 긍정적이다. 슬로다운이 평화롭고 안정적이며, 평등한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성장이 둔화되면서 자본주의의 기세가 꺾이고 경제는 안정되며 부의 불평등이 완화되고 환경오염 문제도 줄어들 것으로 내다본다.
저자는 “속도를 줄인다는 것은 곧 빠르고 치열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속도 안에서 조금만 일하고 가족과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슬로다운은 경기침체를 의미한다. 이런 우려에 대해서도 저자는 “경기침체를 질병 같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반박한다.
경기 침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지구적으로 자리잡게 된 저성장, 저금리, 고강도 규제 등의 ‘뉴 노멀(새로운 표준, New Normal)’ 가운데 하나라는 논리다.
저자는 오히려 “지금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면한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못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