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지난달 21일 국내 출시한 2021 쏘나타 센슈어스. 연식변경모델로는 이례적으로 그릴 디자인을 새롭게 적용했다. 출처= 현대자동차
[이코노믹리뷰=최동훈 기자] 최근 국내 완성차 업체들이 차량 전면부에 부착되는 라디에이터 그릴의 상품성에 주목하고 있다. 그릴이 완성차의 품질 경쟁력을 높이는 여러 부위 가운데, 고객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 활동의 소재로 비교적 활발히 쓰이는 모양새다.
그릴이 단순히 자체 기능을 수행하는 것 이상의 존재감을 지닌 부위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완성차 업체들이 그릴의 상품성을 혁신하는데 투자함에 따라 시장 규모가 확장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릴의 중요성이 입증된다. 14일 미국 시장조사업체 스트랫뷰 리서치(Stratview Research)에 따르면 자동차 라디에이터 그릴 시장의 규모는 오는 2023년 30억8,720만달러(약 3조4,991억원)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코로나19 사태가 발발하기 이전인 2018년 제시된 전망치이기 때문에 올해 현재 이후 전망에 변동사항이 있을 수 있다. 다만 라디에이터 그릴 시장이 신차 판매량 뿐 아니라 고객 니즈에 따른 완성차 제조사의 상품개발 전략에 의해 성장할 수 있다는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릴이 해당 차량의 중량이나 공기역학에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연료효율을 좌우하는 점은 완성차 업체의 투자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다.
스트랫뷰 리서치는 “최근 전세계 완성차 시장에 차량 생산량, 고효율 차량 수요, 심미성 선호도, 경량 부품 수요 등이 모두 증가하고 있는 점은 라디에이터 그릴 시장을 더욱 성장시키는 주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그릴은 일차적인 기능으로 자동차의 핵심 장치를 품고 있는 엔진룸을 외부 이물질로부터 보호하고 주행 중 발생하는 내부 열을 식히기 위한 바람을 받아들인다. 그릴의 이 같은 기능성은 소재 뿐 아니라 디자인에도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BMW는 지난 2019년 새롭게 출시한 대형 SUV X7과 대형 세단 7시리즈 등 두 모델에 디자인을 개선한 그릴을 적용했다. 그릴을 구성하는 디자인 요소의 개별 단위를 의미하는 슬랫(slat)을 기존 대비 7% 정도 얇게 다듬음으로써 공기 와류를 0.9% 가량 완화했다. 이 경우 공기 흐름을 개선함으로써 차량의 주행성능을 강화할 수 있다.
그릴 디자인, 일 잘하고 ‘멋’도 있어야
그릴 디자인은 기능 우수성과 별개로 차량의 인상이나 해당 브랜드의 디자인 정체성을 좌우하는 요소로서 주목받는다. 그릴이 새로운 차량의 전반적인 인상을 형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브랜드의 상품전략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기술교육대 디자인공학과 연구팀이 지난 2019년 성인 45명을 대상으로 현대차의 두 그릴 디자인 컨셉트에 대한 반응을 비교한 뒤 같은 맥락의 결과를 도출했다. 연구팀은 지난 2018년 전후로 현대차의 연도별 신차 그릴에 달리 적용된 디자인 컨셉트인 ‘플루이드 스컬프쳐 2.0’과 ‘센슈어스 스포티니스’ 등 2종에 대한 응답자의 감성어휘를 확보한 뒤 분석했다. 이 결과 플루이드 스컬프쳐 2.0에 대해 ‘점잖고’, ‘고상한’ 등 딱딱한 감성을 느낀 반면 센슈어스 스포티니스에 대해선 ‘경쾌한’, ‘다이나믹한’ 등 동적인 감성에 대해 표현했다.
자동차 전체 이미지를 대변하는 그릴이 본질적인 역할을 잘 수행할 뿐 아니라 높은 심미성까지 갖추는 등 다방면에서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 상황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브랜드 미디어 HMG저널을 통해 “그릴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완성차의 디자인적 측면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신차가 출시될 때마다 주목받는 그릴은 브랜드의 디자인 정체성을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라고 분석했다.
BMW코리아가 오는 16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하는 전시행사 키드니 로드를 통해 그릴 디자인의 변천사와 브랜드 헤리티지에 대해 소구했다. 출처= BMW 코리아
BMW “그릴엔 브랜드 마케팅 목적 담겼다”
완성차 업체들은 그릴 디자인의 이 같은 중요성을 고려해 소비자 요구사항을 신차에 신속하게 반영하거나, 신규 스타일을 과감하게 시도함으로써 반응을 유도하고 있다.
최근 새로운 그릴 디자인으로 소비자 이목을 가장 많이 끌고 있는 국내 완성차 업체로 BMW코리아를 꼽을 수 있다. BMW 코리아는 오는 16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그릴 디자인 변천사를 컨셉트로 기획한 전시 행사 ‘키드니 로드’를 진행한다. 행사를 통해 방문객들에게 그릴 역사와 궤를 함께 하고 있는 브랜드의 오래된 유산(헤리티지)을 과시하려는 취지다.
BMW는 지난 2월5일 인천 BMW 드라이빙 센터에서 뉴 4시리즈 공개 행사를 열고 그릴 디자인에 대한 BMW의 개발 방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BMW코리아에서 M·i 브랜드를 맡고 있는 김종수 매니저는 당시 행사장에서 “BMW는 기술적 요구사항을 반영하고 존재감을 강조하기 위해 뉴 4시리즈에 대형 신규 그릴을 적용했다”며 “이는 디자인, 마케팅 등 측면에 대한 BMW의 목적이 결합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대차도 최근 기아의 중형 세단 K5에 디자인 감성 측면에서 밀린 동급 모델 쏘나타의 그릴 디자인을 선호도 높은 형태로 바꿔 달아 재출시했다. 보석 원석을 깎아낸 듯한 형상의 ‘파라메트릭 쥬얼’ 패턴을 기존 1.6 가솔린 터보 모델 뿐 아니라 2.0 가솔린 등 모든 모델에 동일하게 적용했다. 일부 고객들이 민간 전문업체에 방문한 뒤 기존 쏘나타 트림에 적용됐던 가로형 슬랫의 그릴 디자인을 파라메트릭 쥬얼 디자인으로 변경 적용하는 사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쏘나타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트림을 단순화하는 한편 한층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외관 디자인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브랜드 디자인 ‘변화한다, 고로 존재한다’
업계에서는 앞으로도 완성차 업체들이 다양한 소비자들의 니즈와 브랜드의 디자인 정체성을 동시에 반영한 그릴 디자인을 구현하는데 고심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사회가 다양화 하고 표현영역도 확장됨에 따라 소비자 니즈를 적극 수용한 디자인이 수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주장이다.
한국기술교육대 연구팀은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재한 논문을 통해 “그릴 등 신차 부위별 디자인을 지속 바꿔나가고 있는 현대차의 경우 변화 자체가 브랜드의 디자인 정체성으로 설명될 것”이라며 “최근 브랜드별 디자인 정체성이 과거와 달리 소비자와 소통 가능하며 가변적인 추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