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부품업체 A사는 업계에서 ‘블랙홀’로 불린다.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 부처로부터 최근 8년간 정책자금을 20여 차례 받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보유하고 있는 기술을 조금씩 변형해 기술 개발에 성공한 대가로 받은 지원금이다. 또 다른 차 부품업체 B사의 대표는 실의에 빠져 있다. 2015년 정부 연구개발(R&D) 과제로 자율주행차 관련 기술 개발을 제안해 지원금을 받았지만 실패라는 판정을 받았다. B사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2년간 지원받은 6억원을 토해내고 힘들어 하고 있다.
이 두 회사의 사례는 국내 R&D 지원 체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저비용 고효율 구조에 모험과 도전을 기피하게 해 각 주체가 홀로 연구하는 폐쇄형 모델”이라고 지적했다.
○중복 지원 등 쏠림 지속
가장 눈에 보이는 문제점은 R&D 지원사업이 소수 업체에 쏠리는 중복 지원이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R&D 과제(4만3401개)를 10회 이상 지원받은 기업은 1018곳으로 전체 지원받은 기업의 10%나 됐다. 이 중 재정지원을 10회(금액 기준 5억원) 이상 받은 업체 107곳을 대상으로 매출과 고용 증가 여부를 조사한 결과 평균 매출 성장률이 10% 미만인 기업이 54곳으로 50.4%를 차지했다. 고용 증가율도 10% 미만인 기업이 69곳으로 64.4%에 달했다.
경기도의 한 기계 부품업체 관계자는 “비슷한 주제인데도 유독 잘 선정되는 업체가 있는 게 사실”이라며 “정부 지원금을 직원 인건비 등으로 전용하다 보니 R&D는 뒷전”이라고 지적했다. 김규환 자유한국당 국회의원도 “정부가 R&D 지원 방식을 양적 확대에만 치중할 게 아니라 자금 지원에 따른 실효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R&D 지원의 또 다른 문제는 ‘좀비기업’으로 불리는 한계기업의 연명 수단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계기업은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 1 미만인 기업으로, 영업이익으로 대출금의 이자를 갚지 못하는 상태가 3년 이상 지속된 기업을 의미한다. 2014년 한계기업 142곳 중 R&D 지원 과제로 지원금을 받았지만 지난해 2월 그대로 한계기업에 남은 업체는 45.77%인 65곳에 달했다. 경기 안산에 있는 한 중소기업 대표는 “동종 업체 중 기업 본연의 사업을 통해 존속하는 게 아니라 정부 과제로 연명하는 곳이 있다”며 “성장 기업에 지원해야 할 자금이 한계기업 생존에 쓰이는 건 문제”라고 지적했다.
○‘R&D 성공률’ 92%의 함정
지난해 중기부 R&D 최종평가 과제 4651건 중 4317건이 성공 판정을 받았다.‘R&D 성공률’은 92.8%였다. 이렇게 R&D 성공률이 높은 것은 “성공 가능한 과제를 제출하고, 심사단이 이를 지원 대상으로 선정해주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개발해 놓은 기술을 약간 변형해 과제로 제출하면 성공이라고 판정해준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제도 때문이다. 과제에 성공하면 기술료로 지원금액의 10%만 내면 된다. 하지만 실패하면 지원금액 수억원을 고스란히 토해내야 한다. 또 3년간 정부 R&D 과제에 참여도 할 수 없다. 중소기업들에는 큰 타격이다.
전문가들은 “R&D 시장에서 도전과 모험을 몰아내는 지원 시스템”이라고 했다. 지금도 수행 결과가 안 좋더라도 성실히 연구한 사실이 인정되면 불이익 조치를 면제해주는 ‘성실 실패제도’가 있다. 하지만 이를 활용하는 기업은 극히 드물다.
이런 편법에 가까운 R&D 지원금 수령으로 성공률 92%는 허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R&D에는 성공했지만 돈 버는 데에는 실패한 과제’가 전체의 절반가량 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매출, 수입대체액 등 실적과 연결된 ‘R&D 사업화율’은 51.6%를 기록했다. 김대현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R&D 지원이 사업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성과 분석 평가 체계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며 “정책자금을 받지 못한 기업에 지원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도 고민해 볼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올해 중소벤처기업부의 중소기업에 대한 R&D 지원 자금은 1조917억원, 정부 부처 전체로는 3조원을 웃돈다. 60만 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정책 자금이다. R&D 자금은 융자금과 달리 성공 판정을 받으면 이자나 원금을 상환하지 않아도 돼 인기가 높다.
김기만/김진수 기자 mg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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