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얼굴은 여전히 온화했다. 말투도 차분했다. 기업들의 답답함과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면서도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다. 정부와 국회 등에 대한 서운함을 털어놓을 때조차 차분했다. 다만 말속의 ‘뼈’는 도드라졌다. 조용히 웃으며 회초리를 내리치는 듯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80) 얘기다.
1일 서울 대흥동 경총회관 8층 집무실에서 경제계를 대표하는 좌장 중 한 명인 손 회장을 만났다. 그는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내내 “올해가 두렵다” “절박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강행 등이 불러올 올해 ‘인건비 부담’을 가장 우려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과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 추진, 협력이익공유제 법제화 추진 등 기업을 짓누를 ‘규제 폭탄’도 걱정했다. 인터뷰 말미엔 “정부가 현실을 외면하고 마냥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다”며 “기업들의 절규를 되새겨야 할 때”라고 호소했다.
▶우리 경제가 올해 더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은데요.
“여러 경제·연구기관이 그렇게 예측하고 있지요. 특히 금융회사 연체율이 올라가는 추세예요. 실물 경기의 위기가 금융위기로 이어지지 않도록 정부가 각별히 신경써야 할 때입니다.”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습니다.
“조선과 자동차산업이 어려운 건 맞죠. 작년까지 큰 수익을 내던 반도체마저 올해 호황이 꺾일 것이란 예상이 나오면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중소기업들에 미치는 파장은 이미 커요. 전국 산업공단마다 팔려고 내놓은 공장이 넘쳐나고, 공단 주변 땅값까지 떨어질 정도라니…. 안타깝습니다.”
▶미래 먹거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답답해요. 신성장동력 분야에서 우리가 치고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마다 인구를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수로 나눠봤을 때 미국이 가장 앞서 있습니다. 중국도 우리보다 훨씬 많아요.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는 한국 기업의 속도와 경쟁력이 뒤처지고 있다는 얘기죠.”
▶위기를 탈출할 뾰족한 방법이 없을까요.
“서비스산업을 더 키워야 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서비스산업 비중은 65%를 웃도는데, 한국은 50% 수준입니다. 얽히고설킨 규제 탓이죠. 진입 장벽이 너무 높아요. 대표적인 게 건강·의료 분야입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정부의 경제·노동정책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손 회장은 의자에서 등을 뗐다.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하지만 답변을 관통하는 비판적 시각은 또렷했다.)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논란이 큽니다.
“최저임금 인상 및 시행령 개정(쉬는 주말도 근로시간 인정), 근로시간 단축, 상법 및 공정거래법 개정 추진 등 기업에 부담을 주는 정책이 너무 많은 게 사실입니다.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투자나 고용에 나설 상황이 아니죠.”
▶정부의 일자리 정책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애를 많이 쓰긴 합니다. 그런데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에만 주력하고 있는 게 문제예요. 작은 성과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합니다. 일자리는 기업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기업들이 각종 규제와 낮은 생산성, 높은 인건비, 세금 부담 등으로 잔뜩 움츠러들어 있잖아요. 기업들이 뛸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줘야 합니다.”
▶개정된 최저임금 시행령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개별 기업을 몇 군데 시뮬레이션해 봤는데, 추가 인건비 부담이 생긴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이를 견디기 힘든 중소기업들은 직원을 줄여야 해요. 소상공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경제계가 덮어놓고 반대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사진=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대통령이 보완을 지시했는데도, 고용노동부는 딴소리를 한다고 지적하셨는데요.
“대통령께서 기업 현실을 반영하라고 하셨는데, 막상 해당 부처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괴리’가 있죠. (최저임금법) 시행령을 입법예고까지 했는데 이걸 우리(정부)가 뒤엎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고집’이 작용한 것 같습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도 기업들에 큰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중소기업들은 인건비 부담 탓에 감원을 하고 자영업자들은 아르바이트 직원마저 줄이고 있어요. 부인과 자녀 등 가족까지 불러 일을 시켜야 인건비를 줄이고, 가까스로 수익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미 일자리를 잃은 아파트 경비원도 많습니다. 반대로 노조가 드센 대기업 직원들의 임금은 올라가죠. ‘최저임금 인상의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어느 대학 교수가 말하더군요. 소득주도성장은 한국과 네덜란드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고, 덩치가 작은 나라엔 적합하지 않은 정책이라고…. 일리 있는 얘기라고 봅니다.”
▶정부는 상법과 공정거래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는데요.
“경제는 어려운데 미국 엘리엇매니지먼트 같은 외국 헤지펀드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어떻게 될까요.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이 위협받을 겁니다. 지주회사 및 일감몰아주기 규제 강화 등을 담은 공정거래법도 큰 부담이 될 겁니다.”
▶협력이익공유제를 놓고도 말이 많습니다.
“사적 이익을 사실상 강제적으로 나누자는 것이잖아요. 자본주의 시장 원리를 부정하는 제도라고 봐야죠. 대기업마다 수백~수천 개에 이르는 협력사의 기여도를 측정하고, 이익을 나눠준다는 발상 자체도 비현실적이고요. 대기업들한테 ‘이익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외국 회사들과 일하라’는 얘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기업하기 어려워진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기업들이 강한 규제와 높은 인건비, 강성 노조 등에 치이다보니 견디지 못하는 거죠. 해외로 나간 기업이 많은데, 유턴하는 기업은 별로 없잖아요. 갑갑한 현실을 반영하는 사례죠.”
▶정부의 기업 지배구조 개편 압박도 끊이지 않는데요.
“이번 정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역대 정부마다 재벌 체제를 손대려 했죠. 문제는 기업마다 과도하게 지배구조 개편에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게 된다는 점입니다. 글로벌 경쟁력 강화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엉뚱한 데 힘을 쏟게 되는 셈이죠.”
▶한국의 상속세 부담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국의 기업 상속세율은 최고 65%로 일본(55%)보다도 높습니다. 기업을 상속받은 사람이 세금을 분할 납부하지 못해 회사를 팔려고 하는 사례도 봤어요. 기업인이 자식한테 회사를 물려주느니 공장 문을 닫거나 해외로 나가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정부와 국회 등 정치권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땅에 떨어진 기업인들의 사기를 끌어올려줘야 합니다. 기업이 잘돼야 경제도, 사회도 잘 굴러간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잖아요. 정부와 국회도 이젠 생각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기업은 돈과 힘이 있으니 좀 눌러도 괜찮다고 보는 것 같은데, 이런 낡은 생각을 버려야 해요.”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1957년 경기고 졸업
△1961년 서울대 법학과 졸업
△1968년 삼성전자 입사
△1991년 삼성화재 부회장
△1993년 CJ 부회장
△1994년 CJ 회장
△1995년 CJ그룹 회장(현)
△2005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2007년 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위원
△2011년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장
△2018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현)
장창민/박종관 기자 cmj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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