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비상장 벤처기업에 복수의결권을 허용하기로 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가운데)이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영우 기자 youngwoo@hankyung.com
비상장 벤처에 복수의결권 허용비상장 벤처기업 창업 경영주에게 주당 최대 10개의 복수의결권을 주는 방안이 추진된다. 국내 처음으로 ‘1주 1의결권’ 원칙에 예외를 인정하는 차등의결권이 도입되는 것이다. 창업자가 경영권 희석 우려 없이 대규모 투자 유치를 받아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기업)으로 성장할 토대를 마련해주겠다는 취지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제18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를 열고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가 투자 유치로 경영권을 위협받는 경우 주주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거쳐 주당 의결권 10개 한도로 복수의결권 발행을 허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복수의결권 주식이란 주당 여러 개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을 말한다. 정부는 대규모 투자 유치로 창업주 지분이 30% 이하로 떨어지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잃는 경우 복수의결권 발행을 허용하기로 했다.
벤처기업이 복수의결권을 도입하려면 주주총회에서 발행된 주식 총수 4분의 3의 동의를 받아 정관을 개정하고, 발행 수량·가격 등 주요 내용에 대해 역시 4분의 3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다음달 말까지 입법 예고한 뒤 올해 안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정부인증 벤처, 전체 中企 1% 뿐…일반中企와 형평성 문제 제기도정부가 처음으로 차등의결권 카드를 꺼낸 건 벤처·창업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경영권이 희석되는 우려 없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적용 대상은 정부의 벤처 인증을 받은 비상장 기업으로 제한했다. 중소기업계에선 벤처인증이 없는 혁신 강소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감사 선임·보수·배당엔 적용 안돼복수의결권 도입은 벤처업계의 숙원이었다. 스타트업이 대규모 외부 투자를 받을 때마다 지분이 희석되는 만큼 경영권을 고려해 투자 규모를 줄여야 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회사를 경영하는 창업주에게만 복수의결권 주식 발행을 허용키로 했다. 발행요건도 대규모 투자유치로 창업주 지분이 30% 이하로 떨어지거나 최대주주 지위를 상실하는 등의 경우로 제한할 계획이다. 복수의결권 도입을 위해 정관을 개정하거나 주식을 발행할 땐 발행주식 4분의 3 이상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복수의결권이 편법 경영권 승계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상속·양도 및 이사 사임 때에는 복수의결권 주식을 보통주로 전환해야 한다. 상장 후에는 원칙적으로 복수의결권 주식을 모두 보통주로 전환해야 한다. 다만 3년간 유예기간을 부여해 경영권 방어가 가능하도록 할 방침이다. 복수의결권의 존속기간은 최장 10년이다.
소수 주주와 채권자를 보호하기 위해 감사의 선임 및 해임, 이사의 보수, 이익 배당 등 주요 의결사항에 대해선 복수의결권을 적용하지 않는다. 또 투명성 강화 차원에서 복수의결권 주식을 발행한 기업은 발행요건, 보유주주, 존속기간 등을 중소벤처기업부에 3개월 이내에 보고해야 한다. 보고를 누락하거나 허위로 작성한 경우에는 과태료가 부과된다. 벤처업계는 ‘환영’, 캐피털은 ‘우려’벤처기업협회는 이날 “창업자가 안정적인 경영권을 기반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게 돼 유니콘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복수의결권 도입과 행사에 까다로운 조건들이 붙은 점은 아쉽다는 반응이다. 복수의결권을 받기 위한 ‘지분 30% 이상 보유 주주’, ‘누적투자 100억원 이상’ 등 요건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최성진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는 “이번 제도에서 상장 전 투자 유치 규모나 창업주 지분 비율 등의 조건들은 너무 까다로워 실제 이를 충족할 만한 벤처기업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감사 선임이나 보수, 배당 등을 정할 때 복수의결권이 제한되는 것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 벤처업계 대표는 “복수의결권 행사가 상장 후 3년으로 제한되는 데다 보수·배당·정관변경 때엔 제한되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업계에선 “기존 창업자에게 큰 혜택을 주게 되면서 잘못된 경영에 대한 견제기능이 약해지고, 투자도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유효상 숭실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모든 벤처 창업주에게 일괄적으로 복수의결권을 줘서 주주로서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선뜻 투자하려는 VC들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非벤처 중소기업은 제외정부가 ‘비상장 벤처기업’으로 대상을 한정한 것에 대해 일각에선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재 한국엔 360만 개 중소기업이 있다. 이 중 정부 벤처인증을 받은 비상장 업체는 3만8000개 정도다. 복수의결권을 적용받는 중기는 전체의 약 1%에 그치는 셈이다. 정부로부터 벤처 인증을 받으려면 투자유치 경력, 연구개발, 기술평가보증 등에서 다소 까다로운 자격을 갖춰야 한다.
증강현실(AR) 기기를 제작하는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제조기반 일반 중소기업들이 플랫폼이나 서비스 벤처기업보다 더 많은 초기 투자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벤처인증기업에만 복수의결권 혜택을 주는 것은 역차별”이라는 지적이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과 기술보증기금, 벤처캐피탈협회 등 3개 기관에서 벤처인증을 하고 있는데, 인증에 필요한 서류가 많고 준비 기간도 오래 걸린다. 기술혁신형 중소기업 모임인 이노비즈협회의 강장형 본부장은 “이노비즈에도 기술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을 갖춘 중소기업이 많은데 배제됐다”며 “혁신 중소기업과 벤처 간 형평성에 문제를 조정해야 한다”고 했다.
안대규/김동현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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