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공기관이 건설 플랜트 등을 해외에서 수주할 때 거쳐야 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간소화하고 손실이 발생해도 직원들을 면책해주기로 했다. 600억달러 이상이던 해외수주액이 4년 만에 반토막나자 꺼내든 조치다. 현 정부는 이명박(MB) 정부 때 수주한 해외자원개발 사업이 대규모 손실을 봤다며 ‘적폐’로 규정하고 지난해 검찰 수사까지 의뢰했다. 정부는 예타 간소화와 책임자 면책을 추진하는 이유에 대해 “해외 사업은 리스크가 높고 성과는 장기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공기업 관계자들 사이에서 “그런 기준을 해외자원개발 사업에는 왜 적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책금융 6조원 지원
정부는 14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해외수주 활력 제고 방안’을 확정했다. 기재부는 회의 직후 보도자료를 내고 “공공기관 경영평가 시 해외수주 관련 사항을 반영하겠다”며 “공공기관의 해외수주 절차 간소화를 위해 올해 하반기에 예타 기준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이어 “해외 사업은 규모가 크고 입찰 참여 지연 시 사업 수주가 불가능하다는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이 해외 투자로 손실이 발생해도 주무부처 장관이 관련 직원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개인적 비위, 고의·중과실이 없으면 손실이 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해외수주에 나서는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을 위해 총 6조2000억원의 정책금융을 지원하기로 했다. 이 중 4조7000억원은 올해 안에 조성한다.
홍 부총리는 “이번 대책을 충실히 이행하면 올해 안에 총 사업비 780억달러에 달하는 47개 해외 사업을 수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리 제품 수요와 국민의 일자리를 해외에서 창출할 수 있다”고 했다.
“적폐로 규정할 땐 언제고…”
정부가 해외수주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은 최근 내수경기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수출 부진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고용 투자 등이 부진한 상황에서 해외 인프라 사업 수주가 돌파구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해외수주 규모는 2014년 660억달러에서 지난해 321억달러로 절반 이상 줄었다. 해외자원개발 수사가 시작된 2015년부터 수주 규모가 뒷걸음질치기 시작해 예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현 정부 출범 후 ‘해외자원개발 혁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전·현직 공무원과 산하 공기업을 대대적으로 조사한 바 있다. 박근혜 정부 때 해외자원개발에 대한 감사원 감사와 검찰의 수사가 있었음에도 산업부는 작년 5월 재수사를 검찰에 의뢰했다. 이 과정에서 강남훈 에너지공단 이사장, 문재도 한국무역보험공사 사장, 김경원 지역난방공사 사장, 김영민 한국광물자원공사 사장 등이 MB 정부 때 산업부 에너지라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줄줄이 옷을 벗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과거 정권의 해외 사업을 적폐로 규정했던 정부가 발등의 불이 떨어지자 이를 장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기업 관계자는 “해외자원개발 사업에 대한 학습 효과가 있어 공공기관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움직일지 의문”이라며 “MB 정부 때도 정부가 해외자원개발 손실에 대한 면책권을 준다고 했지만 정권이 바뀌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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