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스타트업 생태계가 부진을 겪으면서 지난해 증권사 벤처투자 움직임도 크게 줄었다. 벤처투자의 주요 회수 수단인 IPO(기업공개) 심사 강화와 함께 경제 침체 등이 증권사의 투자심리를 위축시킨 것으로 풀이된다.
15일 벤처투자 정보업체 더브이씨에 따르면 자기자본 기준 국내 10대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NH·삼성·KB·하나·메리츠·신한투자·키움·대신)는 지난해 벤처·중소기업 49곳에 약 7429억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23년(1조8195억원) 대비 59% 줄어든 수치다.
증권사별 투자 규모를 살펴보면 하나증권이 2023년 기준 30건의 투자건수를 기록했으나, 지난해 8건에 그쳤다. NH투자증권도 2023년 12개 기업에 투자를 진행했지만 지난해 5건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반면 한국투자증권은 2023년 7건에서 지난해 11건으로 유일하게 투자건수가 늘었다.
이외에도 ▲미래에셋증권(7건→6건) ▲삼성증권(7건→4건) ▲KB증권(19건→11건) ▲신한투자증권(7건→1건) ▲메리츠증권(3건→1건) ▲키움증권(2건→1건) ▲대신증권(4건→1건) 등이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줄였다.
삼성증권의 경우 집행 건수는 줄어든 반면, 투자 금액은 늘었다. 지난해 삼성증권 투자집행 규모는 1236억원으로 전년(722억원) 대비 514억원(71.19%) 증가했다. 여행 애플리케이션(앱)을 운영하는 마이리얼트립 시리즈F의 주요 출자자로 참여해 750억원 이상의 투자금을 집행한 것이 주효했다.
삼성증권을 제외한 증권사의 투자 집행 금액은 감소했다. 신한투자증권의 투자 집행 규모는 2023년 2800억원에서 지난해 100억원으로 급감했다. 같은 기간 하나증권은 2023년 3460억원에서 지난해 830억원으로, NH투자증권은 1070억원에서 213억원으로 각각 줄었다. KB증권도 3729억원에서 1685억원으로 투자액이 감소했다.
벤처투자에 대한 증권사 투자 규모가 쪼그라든 것은 파두로 촉발된 IPO 심사 강화 등이 요인으로 꼽힌다. 벤처투자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초기기업에 투자하고 IPO나 M&A(인수·합병) 등으로 투자금을 회수하며 수익을 창출하는 구조다. 하지만 파두 사태 후 IPO 문턱이 높아지면서 투자금 회수에 어려움을 느낀 증권사들의 투자심리가 위축됐다는 의견이 나온다.
지난해 8월 코스닥에 입성한 파두는 그해 연말 '뻥튀기 상장' 논란에 휩싸였다. 조 단위 대어였지만 상장 직후인 2023년 3분기 어닝 쇼크 수준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로 인해 기술특례 상장의 문턱이 한층 높아졌다.
IPO 심사 강화의 영향으로 지난해 자진 상장 철회 기업은 35곳으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바이오 최대어로 꼽히는 오름테라퓨틱스를 포함해 미트박스글로벌, 넥셀, 다원메닥스 등이 지난해 증시 입성을 포기했다.
이와 더불어 장기간 이어진 증시 부진과 높은 고금리·고물가 현상이 이어진 점도 지난해 벤처투자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경기침체로 시장이 어려워지면서 옥석가리기로 성공할 만한 확실한 기업에만 투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최근 금융당국이 증권사의 모험자본 공급을 강조한 만큼 증권사의 벤처투자에 대한 활성화는 다시 커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 분위기가 개선되면 기술력을 갖춘 벤처기업들을 미리 선점해 새로운 수익원을 발굴하려는 증권사의 움직임은 다시 나타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