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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한국판 양적완화와 중앙은행 (상)

입력: 2016- 04- 12- 오후 01:25
(장태민 칼럼) 한국판 양적완화와 중앙은행 (상)

서울, 4월12일 (로이터) -

3월28일 오후.

4월20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4명의 금통위원 후임이 이날 발표됐다. 금융위 상임위원과 KDI 출신 2명, 그리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이 추천됐다.

한 사람은 정부 관료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국민경제자문회의 자문위원, 대통령직인수위 등에서 활약한 '정부 경제정책'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었다.

발 빠른 채권시장은 신임 금통위원 명단이 공개된다는 소식에 강세로 매진했다. 국채선물 가격은 뛰고 채권금리는 빠졌다.

논리는 간단했다. 정부의 (금리인하를 원하는) 입김이 작용할 것이란 기대감이었다. 일각에선 '친박' 금통위원들이 등장했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정부가 경기부양에 매진한다면 기준금리를 더 낮출 것이란 기대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다음날인 3월29일 아침.

3년 만기 국채선물은 전날보다 3틱 오른 110.31로 거래를 시작했다. 미국채 금리가 소폭 하락하고 신임 금통위원에 대한 기대감이 좀더 이어지는 듯했지만, 가격부담이 나타나면서 장은 그다지 강하지 못했다. 시장금리가 이미 한 차례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을 반영하는 등 금리수준이 너무 낮아서 레벨 부담을 피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개장 후 얼마 안 있어서 갑자기 시장이 크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4년마다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가 2주 후로 다가온 가운데 집권여당의 공약이 알려지면서 시장은 흥분에 휩싸인다.

새누리당이 성장률 3% 달성을 위해 정책강도를 높이고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까지 주문할 것이란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남의 일로만 알고 있던 양적완화라니. 기준금리가 역사적 최저수준이지만, 여전히 1.5%로 추가 금리인하의 여지도 있는데 무슨 양적완화란 말인가.

이자율 시장은 다시 정치의 풍랑으로 빨려 들어간다.


▲ 노장 정치인의 등장


새누리당은 3월 29일 '20대 총선 경제정책공약 2호-거시경제정책운용'에서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지목하면서 '한국판 양적완화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한다.

이 정책을 발표한 사람은 70대 노장 정치인 강봉균 씨였다.

과거 정보통신부 장관, 재정경제부 장관, 청와대 경제수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 남들은 한 자리도 꿈꾸기 힘든 자리를 무수히 거친 인물이었다.

경제관료 등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정치권에 입문한 인물이었지만 새누리당과는 인연이 멀었던 사람이다.

강봉균 씨는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 열린우리당 정책위 의장을 역임하는 등 민주당 계열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과거의 그를 두고 금리 인하, 재정 집행 등 적극적인 경기부양을 좋아하는 스타일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강 위원장은 또 과거 민주당 계열의 의원들과 성향 차이로 적지 않은 갈등을 빚어왔다. 그런 뒤 내쳐졌다.

이후 2016년 3월 새누리당의 '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전격 영입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야당에서 버림받고 야인으로 소일하고 있을 때 여당이 기막힌 '인재 영입' 타이밍을 잡았다고 평가했다.

▲ 신구(新舊) 경제수장들의 '혼선'

3월29일 새누리당 총선 공약 자료에 담겨 있는 한국판 양적완화 내용은 이랬다.

<산업은행의 기업구조조정 선도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신규자금 공급능력을 최대할 수 있도록 한은이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함. 주택담보대출증권을 직접 인수해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상환기간을 20년 장기분할상환제도로 전환시킴.>

강봉균 선대위원장은 3% 성장을 달성하는 등 경기부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전하고 경제 '진단과 해법'을 내놓았다. 진단은 이랬다.

<우리 경제는 돈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있는 돈맥 경화에 빠져 있음. 중앙은행은 기준금리 정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중자금이 막혀 있는 곳에 통화가 공급될 수 있도록 통화정책을 운영할 필요가 있음.>

금리 추가인하를 원하는지는 불투명했다. 그간 금리를 내려도 돈이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았다는 차원에선 반드시 추가 인하를 원한다고 보기 어려웠다.

추가적인 확인이 필요했다. 한국의 경제수장 유일호 경제부총리의 입장을 들어보면 뭔가 좀 정리될 듯했다.

29일 오후.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의 통화정책 관련 발언에 대해 "개인 소신도 있는 것 같다. 당의 선거공약으로 하신 건 아닌 것 같다. 공약으로 안 올라갈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부산 출장 중이던 유 부총리가 여당에서 나온 뜬금없는 통화정책 관련 공약에 대해 '공약이라고 하긴 어렵고 강 위원장의 소신인 듯하다'는 쪽으로 발언한 것이다.

강 위원장이 '한은이 직접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면서 한국판 양적완화를 거론했다는 보도에 대해 "처음 듣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강봉균 위원장은 로이터 통화에서 이날의 통화정책 관련 발언에 대해 재차 '공약'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훈수까지 뒀다.

"한국은행이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속도감 있게 움직여야 합니다."

2015년 6월 기준금리를 1.5%로 내린 뒤 동결 중인 한은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듯했다. 이 발언 뒤 사람들은 금리를 자주 움직이는 게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닌데 왜 이런 발언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과거 한국경제 수장을 지낸 강 위원장의 발언은 현재 한국경제의 수장이 보여준 입장과 부합하지 않았다.

한데 이후 '현직' 경제수장이 물러섰다.

30일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새누리당에서 낸 공약은 존중한다.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언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선이 굵진 않지만 합리적이라고 알려진 유 부총리는 '통화정책은 한은의 영역이고 공약에서 언급한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주문한 부분에서는 많이 참조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의 입장 차이가 크지 않느냐는 질문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난감했다. 여당인 새누리당 공약이 경제수장과 조율을 거치지 않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어색했다.

주변 사람들은 '여당의 정책공약이 뭐냐. 어떻게 경제부총리와 상의도 하지 않고 저런 공약을 내놓느냐'는 목소리를 높였다.


▲ 파워맨들의 '인연 추적하기'

강봉균 위원장과 유일호 경제부총리의 말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이곳저곳에서 나오는 말들이 혼란을 키우는 경우가 많지만, 혼선을 줄이기 위해선 또다른 말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새누리당의 정책 공약이 혼선을 일으킨 만큼 조원동 새누리당 선대위 정책본부장의 입장이 필요했다.

조 본부장은 로이터통신과의 통화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줬다.

<기준금리는 무딘 도끼이며 현 시점에서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는 큰 의미 없다. 외과수술처럼 필요한 곳을 타깃팅해서 한국은행이 직접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최근 새누리당이 발표한 거시경제 관련 공약의 핵심이다. 구체적인 방안은 한은의 △ 총액한도대출(現금융중개지원대출) 확대 △ 산금채, MBS를 발행시장에서 인수할 수 있도록 한은법을 고치는 것 등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관계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조원동 본부장과 새로 영입된 강봉균 위원장의 인연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강봉균 위원장이 DJ정부에서 경제수석을 할 때 조원동 본부장은 행정관으로서 그를 보조했다. 이후 두 사람의 인연이 계속 됐다.

그리고 최근에 경제수석을 지냈던 조 본부장이 과거의 경제수석이던 강 위원장에서 '오셔서 뜻을 펼쳐 보시라'하고 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원동 본부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1년4개월 동안 경제수석을 지냈다.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인 인물이며, 이번 선거에서도 정책 쪽을 맡은 것이다.

아무튼 조원동 정책본부장 발언의 취지를 보면, 무차별적인 유동성 공급을 의미하는 기준금리 인하 보다는 '적재적소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한은의 금융중개지원지대출 같은 수단을 염두에 두는 듯했다.

조 본부장이 다시 부각될 즈음에 그의 신변에 관련된 나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조 본부장은 2015년 10월28일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긴 바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10단독 이환승 부장판사는 2016년 4월6일 조 본부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사건 당시 경찰조사에서 거짓 진술을 한 혐의(범인도피)로 함께 기소된 대리기사 한모씨에겐 벌금 200만원이 선고됐다.


▲ 중앙은행의 '침묵'


여당의 한국판 양적완화 공약이 나온 뒤 한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한국은행 관계자들은 "특정 정당의 공약을 평가할 입장이 아니다"는 견해를 보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할 말이 있어도 여당의 공약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한국은행 노조만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한은 노조는 3월31일 성명을 발표했다.

"정치가 통화정책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중앙은행 독립성에 대한 중대한 훼손이며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발권력을 동원한 국가의 경제가 어떻게 망가졌는지 기억해야 한다."

노조의 목소리는 긴박해 보였지만 임팩트는 없었다. 사람들은 힘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좋아한다. 한다면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은법 제76조를 보면 한은이 '정부보증채권'을 직접 인수할 수 있다.

한은법 제76조 1항은 "한국은행은 원리금 상환에 대해 정부가 보증한 채권을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돼 있으며 2항은 "제1항의 인수에 대한 이율 기타조건은 금통위가 정한다"고 돼 있다.

법상으로 한은이 발행시장에 직접 인수할 수 있는 채권은 국채나 정부보증채다. 국채의 경우 국회가 기채한도를 정하며, 정부보증채도 국회 동의를 얻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결국 여당은 한은법을 바꿔야 한다. 새누리당은 향후 국회가 개원하면 한은법을 개정해 '한은이 적극적인 통화정책을 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겠다'고 했다.

한국판 양적완화를 공약으로 내세운 뒤 한은에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법을 고쳐 한은이 산금채나 MBS를 인수할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실제 실행 여부는 '금통위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제3자가 볼 때 이런 식으로 판을 깔아주는 것은 한은더러 '하라'는 압박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 중앙은행의 발행시장과 유통시장에서 채권 사기


중앙은행의 산금채를 직접 매입한다고 해 보자.

일단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뒤 법을 바꾸면 한은이 발행시장에서 산금채와 같은 채권도 인수할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채권을 직접 인수하는 일은 어느 나라든지 '금기'에 가까울 정도로 까다롭다. 일종의 터부였으며 신용리스크가 있는 채권을 직접 매입하는 경우는 찾아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차선의 방안으로 유통시장에서 매입하는 방법 등이 현실성이 높지 않냐는 말이 많았다.

한은법을 바꾸지 않더라도 산금채와 MBS 매입 문제는 금융통화위원회가 대상증권으로 정하면 가능해진다.

환매조건부증권(RP) 매매대상엔 국채나 정부보증채, 통안채, MBS가 포함돼 있다. 금통위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 다른 채권을 포함시킬 수 있다.

RP의 경우 사고 파는 두 가지 거래가 개입된다. 반면 단순매입은 그냥 한은이 시장에서 채권을 사주는 것이다. 단순매입 대상증권도 금통위가 범위를 넓히면 된다.

즉 금통위에서 규정을 바꾸면 유통시장에서 산금채나 MBS를 살 수 있다. 물론 매입할 물량과 금리, 기간 등이 중요할 것이다.

다만 채권 소화가 잘 되는 상황에선 이런 필요성도 크지 않다. 물론 향후 채권 발행금리가 뛰고 채권 소화도 안 되는 상황이 오면 이런 방안들이 힘을 받을 수 있다.

한데 여당의 의지가 너무 강해 보인다. 총선 결과가 관건이지만 지금의 분위기면 여당이 4.13 총선 승리 이후 법 개정을 통해 한은에게 산금채 인수를 명할 듯하다.

(계속)

(taemin.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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