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은 저자의 개인 견해로 로이터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울, 9월28일 (로이터) 임승규 기자 - 돌이켜 보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만큼 '달러 시대의 종언'이라는 표현이 와닿았던 적은 없었던 듯싶다.
당시 금융위기는 결국 미국 부동산 시장 붕괴가 초래한 파국(破局)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절정에 달하면서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가 구축해 온 유일무이한 지위에도 균열이 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0년이 지난 현재 달러의 지위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해 보인다. 터키, 아르헨티나 등 신흥국은 달러 표시 자산 대비 과도한 부채 때문에 통화가치 급락 등 금융 불안을 겪고 있고 선진국들도 외환보유액 확충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세계 준비자산 가운데 달러는 62.5%를 차지하며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달러를 무기화해 경쟁상대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0년 주기로 한 번씩 '달러의 몰락'이 회자됐지만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달러 대안이 없다'..트랩에 빠진 투자자들
미국이 아무리 자살골을 넣어도 달러의 지위가 이처럼 요지부동인 이유는 뭘까?
IMF 중국사무소장을 지낸 에스와르 프라사드 미국 코넬대학교 교수는 지난 2015년 발표한 '달러 트랩'이라는 저서에서 '달러가 아니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지만, 달러만큼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자산은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가 과도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켜 외국인들이 가진 미국 국채의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으리라는 투자자들의 믿음이 달러에 대한 수요로 이어진다고 그는 주장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위안과 유로가 보여준 취약성은 오히려 안전자산으로서 달러의 지위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선 모든 게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밉고 달러 투자는 더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도 달러가 아니면 달리 투자할 게 없는 이러한 곤란함을 그는 '트랩'이라고 봤다. 글로벌 시장의 모든 투자자가 이러한 달러 트랩에 빠졌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달러의 지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질리안 테트 파이낸셜타임스 주필은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계 금융회사들이 약진한 것 역시 달러 강세의 한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막대한 세금감면 조치로 미국 경제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도 달러를 부양하는 요인이다.
▲'달러 30% 폭락할 것'..가상화폐 투자 준비하는 미국계 금융사들
하지만 미국의 부채위기가 현실화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한번 '달러의 몰락'이 회자되는 이유다.
이번에 경고음을 울린 사람은 바로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어소시에이츠(Bridgewater Associates)의 회장인 레이 달리오다. 레이 달리오가 누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생을 정확히 예측했고 2011년과 2012년 유럽 재정위기도 예상한 헤지펀드 업계의 전설이다.
그는 최근 발간한 원칙(Principles)이라는 책에서 미국 경제가 버블의 전 단계에 와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2년 이내에 미국 경제가 큰 위기를 맞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2000년과 2008년과 달리 부채위기 형태를 띨 것으로 봤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세금 감면 효과가 줄어들면서 연금, 헬스케어 지출 증가에 따른 미국 정부의 예산 부담이 커지면 결국 국채 발행량이 늘고 차환 발행 압박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 국채에 대한 글로벌 수요가 줄어들면 미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달러를 그만큼 많이 찍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달러가 지금보다 30% 가까이 폭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물론 그는 이같은 달러 폭락 상황이 임박하지 않았고 지금과 같은 글로벌 달러 유동성 위기가 지나간 후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현재 미국 경제가 야구로 치면 7회를 지나고 있다며 '길가에 피가 흥건해지는 폭락 장'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달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달러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흔드는 자료가 버젓이 제시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할 투자자는 많지 않다.
문제는 다시 한번 프라사드 교수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점이다. 달러가 아니라면 대안이 있는가? 위안과 유로의 미래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결국 다시 원점이다.
다만 최근 미국계 대형 투자은행들이 가상화폐 시장 진입을 위해 담금질을 하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띈다.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가 비트코인과 연계된 파생상품 투자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제임스 고먼 모건스탠리 최고경영자(CEO)는 "비트코인은 확실히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섰고 본질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마틴 차베즈 골드만삭스 CFO는 "골드만삭스는 고객의 요청에 따라 비트코인 파생상품도 준비하고 있다"며 "달러로 결제되는 비트코인 역외선물환(NDF)이 다음 목표"라고 밝혔다.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계 금융사들이 누구보다 먼저 가상화폐 시장 진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혹시라도 모를 달러 시대의 종언에 대비한 헤지 전략 아닐까?
(편집 유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