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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칼럼) 어떻게 살 것인가

입력: 2016- 11- 01- 오후 02:04
© Reuters.  (장태민 칼럼) 어떻게 살 것인가

서울, 11월1일 (로이터) - 2007년 야구시즌이 끝난 뒤.

"이제 제 나이 33살로 야구선수로는 환갑에 가까워졌습니다. 더 늦기 전에 최고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 가서 내가 어느 정도의 투수인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1975년 2월생의 남자. 그는 그렇게 '시민구단' 히로시마 도요카프와 결별하고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일본야구에서 그는 히로시마의 에이스였지만 하위권을 맴도는 만년 약체 팀에 몸 담았던 탓에 마쓰자카 등 전국구 스타들에 비해 주목도는 늘 떨어졌다.

그가 FA(자유계약선수)를 앞둔 2006년 야구시즌이 끝나기 직전 그가 등판한 홈경기.

당시는 히로시마의 에이스가 거액을 받고 팀을 떠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던 때였다. 히로시마 홈구장에 대형 플래카드가 걸렸다.

"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의 빛나는 그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 눈물이 돼 주겠다.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눈시울이 뜨거워진 구로다는 팬들의 성원에 진솔하게 답했다.

"내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이곳에 와서 카프를 상대로 공을 던진다면 내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한 일이 될 것입니다."

2006년 시즌을 마치고 FA 자격을 얻을 때 구로다도 자신의 시장가치를 확인하고 싶었다. 일본야구의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일본야구로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인 4년 30억엔을 제시했으나 히로시마는 그 1/3인 3년 10억엔을 제시했다.

하지만 구로다는 결정은 엉뚱했다. 그는 FA 권리를 내려놓고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2007년 1년을 더 히로시마에서 뛰기로 하는 결정을 내렸다.

▲ 메이저리그에서


2007년 1년을 더 히로시마에 뛴 구로다는 여전히 '순수하게' 자신의 능력이 궁금했다. 하지만 최고의 무대라는 곳에 직접 서보기 전까지는 나를 파악할 수 없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는 이런 얘기를 했다.

"설레임같은 건 없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죠. 그리고 만약 내게 힘이 남아 있다면 나중에 돌아와서 히로시마에서 마지막 공을 던지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시험해 보고 싶은 순수한 의지. 그렇게 구로다는 미국야구라는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구로다는 메이저리그에서 2008년부터 2014년(다저스 4년, 양키스 3년)까지 7년을 뛰면서 79승79패 평균자책점 3.45를 기록했다.

상당히 양호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투수 중 유독 승리와 인연이 없는 선수여서 승률은 5할에 그쳤다.

특히 투수에게 불리하기로 유명한 구장 양키스타디움을 홈으로 쓰는 뉴욕 양키스에서 뛸 때는 팀의 가장 안정적인 투수로서 2012년 16승, 2013년 11승, 2014년 11승을 거뒀다. 당시 양키스는 선발 로테이션이 무너진 암흑기를 거치고 있어서 구로다의 안정감은 더욱 빛이 났다.

이런 구로다에겐 하나의 버릇이 있었다. 일반적인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은 다년계약을 원하지만, 구로다는 1년 계약을 고집했다.

2008년 LA다저스와 3년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 2011년 '나이가 많은 든 때부터'는 1년씩만 계약한 것이다. 그의 발언은 모든 야구팀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팀 역시 노장선수와의 다년계약은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대신 제가 매년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2014년 시즌이 끝났을 때.

양키스는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구로다를 잡고 싶어했다. 다른 팀 역시 구로다에게 쏠쏠한 금액을 제시하면서 그의 마음을 사로 잡고 싶어했다.

구로다는 양호한 성적 외에도 '안정성'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시즌 중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구로다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러다보니 나이 40이 된 선수를 잡기 위해 메이저리그의 많은 구단이 큰 금액을 제시했다.

구로다를 주식에 비교하자면 엄청난 이익을 안겨주는 성장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늘상 안정적인 배당 수익을 안겨주는 알토란같은 최고의 배당주였다.

한데 구로다는 또 바보같은 결정을 내린다. 메이저리그 팀들의 그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힘이 남아 있을 때'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 일본리그에서


구로다는 고교시절 존재감 없는 패전처리 투수였다.

임팩트 없는 후보선수가 일본 고교야구의 성지인 고시엔에 설 일도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야구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학 때까지 야구를 해보자면서 아들을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구로다는 도쿄의 센슈대학에 진학해 선수생활을 연장했다.

센슈대학도 야구를 잘하는 학교는 아니었다. 별 볼일 없었던 선수는 대학의 2부 리그를 뛰면서 야구에 뒤늦게 눈을 뜬다.

대학교 3학년 때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으며 4학년 때는 직구 구속을 150km까지 끌어올리면서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켰다.

고교시절 '전혀' 성장잠재력을 보여주지 못한 투수 구로다. 대학 1,2학년 때까지도 이 선수를 눈 여겨보는 스타우터는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히로시마 카프의 스카우터만이 유독 구로다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구로다와 히로시마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졸업 후 구로다는 '역지명'을 통해 만년 하위권 팀 구단 히로시마에 입단했다. 구로다는 1996년 신인 드래프트 2차지명에서 좋은 팀들을 마다하고 히로시마 카프를 역지명하면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히로시마 카프에 입단한 구로다는 메이저리그 진출전 11시즌 동안 103승 3.69의 성적을 남기면서 팀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특히 시즌 마감 후 FA가 되는 2006년 시즌 구로다는 평균자책점 1.85, 13승6패라는 최고 성적을 남긴다.

입단 초기 4년간 4~6 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뒤 이후엔 3~4점대의 안정적인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에이스로 성장했다. 메이저리그 진출 전인 2007년 성적은 평균자책점 3.56, 12승8패였다.

구로다는 최고의 특급 투수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일본 리그에서 한번도 사와무라상(메이저리그 사이영상에 해당하는 최고투수상)을 타 본 적이 없었다. 메이저리그로 떠나기 전 일본리그에서 3점 아래의 방어율을 기록한 적도 2006년이라는 '이상한' 해 딱 한 번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 쉽게 무너지지 않은 최고의 안정감 등은 방어율이나 승패수로만 재단할 수 없는 구로다의 독보적인 능력이었다.

2016년 은퇴시즌까지 구로다는 일본리그 13년간 124승105패, 3.5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7년간 79승79패 3.45의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그는 리그를 가리지 않는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 돈


구로다는 2008년 다저스와 3년간 평균 3530만달러 짜리 계약을 체결한다. 일년 평균 1천만불 남짓을 받기로 하고 다저스와 계약했던 것이다. 과거같으면 야구선수로 환갑을 맞을 나이에 대단한 계약을 맺은 것이다.

이후 3년간 알토란같은 활약을 하는 것을 보고 다저스는 2011년 시즌 계약을 연장했다.

이듬해 양키스로 이적할 때 '악의 제국'은 좀더 늙어버린 구로다에게 1년에 1600만불(약 180억원)을 안겨주면서 팀의 살림꾼 역할을 부탁했다. 구로다는 그해 200이닝 넘게 던지면서 3점대 초반 방어율을 기록해 초라해져가던 양키스 마운드를 지탱했다. 돈 값을 하고도 남는 성적을 올렸다.

지명타자 제도를 활용하는 아메리칸리그에서 3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점이면 아주 준수한 성적이다. 2016년 아메리칸리그에서 평균자책점 2점대를 찍은 선발투수는 아무도 없었다.(투수가 타석에 서는 내셔널리그 소속 투수들의 방어율이 아메리칸리그 소속 투수들보다 좋다.)

구로다는 메이저리그 마지막해에 11승, 3.71의 방어율로 정상적인 로테이션이 불가능해진 양키 마운드를 혼자서 지키다시피했다. 이 해에 그는 철완의 기준인 200이닝에 단 1이닝이 모자란 199이닝을 던졌다. 40살짜리 투수가 보여준 괴력이었다.

이런 구로다는 2014년을 끝으로 메이저리그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양키스를 비롯해 구로다의 '안정성'을 필요로 하는 팀은 많았으며, 거액을 제시하는 팀들도 나타났다.

특히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는 1800만달러(200억원가량)를 제시하면서 '우리와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로다는 200억짜리 제안을 뿌리치고 그 돈의 1/5에 불과한 제안을 한 친정 히로시마 카프로 복귀한다. 그는 메이저리그 팀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말을 남긴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제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준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의 저를 있게 만든 고향팀 히로시마로 가기로 했습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던지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 커쇼


2010년대 메이저리그를 지배하는 단 한명의 선수를 꼽으라면, 그는 클레이튼 커쇼일 것이다.

구로다와 커쇼는 인연이 깊다. 그리고 실력뿐만 아니라 인성에서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는 상남자들의 우정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2011년말 다저스타디움.

구로다의 마지막 다저스 홈 등판 경기 때였다. 커쇼는 기꺼이 구로다의 캐치볼 상대를 됐다. 시즌은 사실상 끝났고 한해 동안 많은 공을 던진 커쇼에겐 어깨 보호차원에서 '공을 만지지 말라'는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커쇼는 '절친' 구로다를 위해 금지령을 묵살했다.

"그가 선발인데 내가 캐치볼을 해주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4년간 다저스에서 구로다는 커쇼의 단짝이었다. 커쇼가 최고의 투수로 무르익기 직전부터 둘의 관계는 돈독했다.

구로다는 뉴욕 양키스로 옮긴 후 커쇼와의 이별을 이렇게 회고했다.

"커쇼와의 이별은 너무 슬펐죠. 하지만 내가 있던 팀은 늘 언더독이었습니다. 이 나이에 얼마나 더 야구를 하겠습니까. 월드시리즈(메이저리그 챔피언 결정전) 무대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2013년 7월 다저스타디움에서 둘은 운명적인 맞대결을 벌였다.(평소엔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에 속한 팀이 서로 맞붙을 일이 거의 없으나, 리그간 교차경기에서 만난 것이다.)

그 때 커쇼가 말했다.

"나는 히로(구로다)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로다는 "친구인 커쇼와는 맞붙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날 경기에서 구로다는 7이닝 무실점, 커쇼는 8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경기는 양키스가 3:0으로 이겼으며 둘 모두 개인 성적에 승패를 남기지 않았다.

2016년 구로다가 일본에서 미일 통산 200승을 거뒀을 때 커쇼는 구로다에게 진심어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내 일처럼 기쁩니다. 구로다는 여기서도 훌륭한 경력을 남겼고 일본에 돌아가서도 일을 해냈습니다."

상남자들의 우정에 13살의 나이차같은 건 중요치 않았다. 일본야구 베테랑 구로다와 메이저리그 신입생 커쇼는 모두 2008년에 다저스에서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한 동기였다.

커쇼는 자신이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로 발돋움하기 전 항상 구로다와 여러가지를 논의했으며, 구로다가 매일 어떻게 경기를 준비하면 좋을지에 대한 본보기를 보여줬다고 했다.

2016년에 미일 통산 세계 프로야구 최다안타를 기록한 스즈키 이치로는 구로다의 '통산' 200승 소식을 들은 뒤 '미일 통산 200승은 인정할 수 없다'는 위트섞인 축하를 하기도 했다.

미국인들에게 '미일 통산 세계최대안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은 이치로가 친구에게 특유의 기지 넘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 그리고 은퇴

2016년 10월 18일.

구로다는 전격 기자회견을 열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구로다는 2016년 일본야구 정규리그에서 10승과 3점대 초반 방어율을 거두면서 '여전히 쓸모가 큰' 투수임을 증명한 상황이어서 그의 은퇴선언은 놀라웠다.

히로시마가 센트럴리그(일본은 지명타자가 없는 센트럴리그와 지명타자가 있는 퍼시픽리그 양대리그 체제다) 우승을 차지하고 일본시리즈에 진출한 가운데 이뤄진 그의 발표는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했다.

하지만 구로다는 자신이 늘상 지키고자 하는 원칙을 얘기하면서 팬들의 동의를 구했다.

"이제 선발로 등판해 9이닝을 던질 수 없는 몸상태가 됐습니다. 그런 점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 선수들에게 모범이 될 수 없고 망가질 때까지 공을 던지고 싶진 않습니다."

히로시마는 1984년 이후 32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에 도전했다. 구로다를 제외하더라도 이미 강팀으로 성장한 히로시마에게 여전히 구로다는 팀의 '정신적 지주'였다.

구로다가 그동안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이루지 못한 대업을 달성한 뒤 선수생활을 마감할지는 크나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히로시마는 일본시리즈에서 투수와 타자를 겸업하는 '이도류' 오타니가 이끄는 니혼햄에 패했다.

구로다는 3차전에 선발등판해 5와 2/3이닝을 1실점으로 호투하던 중 허벅지 통증으로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히로시마는 첫 두 판을 이긴 뒤 4연패 하면서 니혼햄에게 우승을 내줬다. 시리즈는 6차전에서 끝이 났으며 7차전 선발로 예정됐던 구로다에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었다.

구로다는 결국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한 채 20년 야구선수 인생을 마감하게 됐다. 선수생활 마무리는 영화처럼 극적이지 못했다.

"7차전 선발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리즈가 끝났다는 게 실감나지 않습니다. 내 야구선수 인생이 끝났다는 것보다 팀이 졌다는 데에 더 마음이 아픕니다."

히로시마 도요카프는 구로다의 배번 15번을 팀 역사상 세 번째로 영구결번한다고 발표했다. 영구결번의 이유는 '팀과 고난의 역사를 함께 한 에이스 투수로서 돈 이외의 가치를 일깨워 준 점' 등이 꼽혔다.

구로다는 일본프로야구 13년, 미국프로야구 7년간 203승184패를 기록한 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많이 이기도 하고 또 많이 지기도 했다. 한번도 시리즈 우승을 못했지만, 그는 자신의 좌우명 대로 살아냈다.

"눈보라 견뎌낸 매화꽃은 아름답다."

그는 단순히 마운드의 지배자가 아니라 야구의 '장인'으로 기억될 것이다.


▲ 어떻게 살 것인가

위의 얘기는 얼마 전 만났던 지인의 질문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에 대한 나의 답이었다.

마침 한미일 야구시즌의 정점이기도 해서 '내가 생각하는' 답으로 구로다의 얘기를 해줬던 것이다.

지인은 직장생활을 20년 했지만 여전히 사회부조리에 대해 분노하고 정의감이 남아 있는 사내였다.

그는 한국 사회에 부정부패가 넘쳐나고 공직에 몸 담은 사람들은 '오로지 자산의 이익'만을 앞세우면서 한국경제의 잠재력이 소진되는 이 때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내가 추천한 구로다의 방식이 그에게 얼마나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의 느낌 그대로 지금은 무능한 자들이 한국 경제 곳곳의 좋은 자리는 몽땅 차지하고선 사리사욕을 위해 나라경제를 분탕질하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권력의 성은을 입은 '잘 나가는 사기꾼'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2016년 10월 '박 대통령-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아무런 직책도 없는 아낙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고 기밀문서까지 미리 받아봤다고 한다. 상상하기 어려운 경악스런 일이었다. 최순실 일가는 또 각종 재단이나 회사를 만들어 국민의 돈을 갈취하고 정권의 인사문제까지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대통령은 자신이 젊은 시절 의지했다는 최태민 목사의 가족들에게 여전히 의지하고 있었다. 최 목사의 딸 최순실, 사위 정윤회 등에게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최태민 목사는 부인을 여럿 두고 각종 사기사건을 일으켰던 비리의 대명사였던 사람이다. 아버지의 비리를 보고 배운 것인지, 최순실과 그 가족 일당의 비리 행각은 더욱 진화된 듯했다.

국민들은 처음보는 비리에 당혹했다. 나의 지인은 대통령에 대해 하야가 문제가 아니라 범죄 조사를 받아야 한고 했다. '모르고 한 일'이라면 더욱 문제가 크다고 했다. 기본적인 국가 시스템도 모르는 사람이 한 나라의 국정을 이끄는 것은 전 국민을 우롱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 정직 < 부도덕


내가 아는 지인은 한국경제에서 성실함같은 기본 덕목은 전혀 먹히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최순실·정윤회 등 대통령의 비선실세, 우병우·안종범 청와대 수석같은 비리의혹을 받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치부에만 열을 올린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파일(국가기밀로 볼 수 있는 문서 등이 담긴 파일)이 공개되기 전 이미 우병우 민정수석이 각종 비리에 연루돼 있다는 얘기가 파다했지만, 검찰은 조사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검찰 역시 힘 센 정권에 복무하는 주구나 나름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람들의 이런 입장은 야당이나 여당의 '대통령과 친하지 않은' 의원들이 하는 주장과 별반 차이 없는 것이었다.

정도를 걷는 게 아니라 꼼수를 부리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성실한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다. 이러면 나라 경제는 퇴조하고 만다. 사실 한국사회가 너무 천박해진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버리기 어렵다.

구로다의 20년 프로야구 선수 인생은 '성실함' 그 자체였다. 나이가 들면서 그의 몸 관리는 더욱 세밀해졌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정도와 의리를 지키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는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한국사회에선 이렇게 살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런 바보들이 있어야 경제는 훨씬 부드럽게 돌아간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여기까지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저 비리를 저지른 자들만이라도 제대로 솎아내면 다행일 것이다.


△ 미래 < 현재


나의 지인은 한국경제는 '미래 비전' 없이 단기성과에만 집착하는 식으로 굴러간다고 비판했다.

그는 성장률이 안 나오면 금리나 내리고 재정이나 투입하는 식의 대증요법 외엔 아는 게 없는 자들이 이 나라 경제를 이끌고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 역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경제를 인식하는 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한국은 경기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낮추는 동시에 부동산을 띄우는 정책에 열을 올렸다. 이런 점들이 성장률을 다소 끌어올렸다.

하지만 그 결과 가계부채가 늘어 소비여력이 줄었으며, 건설투자 등 특정 부문이 한국성장률을 이끌었다. 아울러 성실하지만 물려받은 게 없는 평범한 직장인은 제 돈으로 집을 살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무엇보다 지금의 괜찮은(?) 성장률 조차 사실 미래를 크게 희생한 대가다. 높은 주거비가 문제가 되다보니 젊은층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한국은 '오랜기간 미래를 좀먹는 정책을 쓴 결과' 특별한 수를 쓰지 않으면 앞으로 매출이 줄어들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경제 구조를 갖게 됐다. 이것은 글로벌 경기가 나빠서도 아니다. 정책가들이 부동산 띄우기 등 편협한 정책에만 올인해 생긴 인재(人災)다.

사실 지금 한국경제는 1960대후반~1970년대 초반의 100만세대(출생자 기준), 즉 40대 중후반이 탄탄해 쉽게 무너지기 쉽지 않는 구조다.

하지만 젊은층을 못 살게 하는 정책을 꾸준히 써온 탓에 출생 인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태어난 인구수 기준으로 지금의 40대 중후반이 100만세대, 30세 정도의 인구가 60만 초반 세대, 15세 인구는 50만 전후 세대, 그리고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40만 초반 세대가 된다. 출산인구는 올해를 포함해 최근 수년간이 가장 위험스러웠다.

복잡한 계산 필요없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한국경제의 '매출'은 줄어들 공산이 커졌다. 아무리 평균 수평이 늘어나고 늙어서까지 일하는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도 이런 기본 구도를 돌리진 못한다. 오히려 노인 부양 문제가 국가재정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억지로 끌어올린 단기적 성장률 수치에 기뻐할 수도 없다. 주식 투자를 할 때 매출이 줄어드는 기업의 영업이익은 '할인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는 10년 후 정도면 2%의 성장률도 감사해야 할 1%대 성장률 시대를 볼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한 나라가 온전히 자신의 체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도라고 하는 잠재성장률은 둔화가 불가피하다.

나라 경제가 이렇게 된 이유를 세계경제 상황 등 외부적인 요인으로 돌릴 수는 없다. 정책 실패의 결과물일 뿐이다.

구로다는 늘 미래를 대비하면서 자신의 야구인생을 꾸려갔다. 그래서 그는 보통의 직장인 보다 수명이 짧은 '야구선수'라는 직업에서 20년 동안이나 롱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제정책을 마라톤이 아닌 100미터 달리기 쯤으로 인식해온 한국경제 정책가들은 미래의 기초체력(잠재성장률)을 갉아먹으면서 달려왔다.

한 개인의 인생도, 한 나라의 인생도 미래를 기준점 삼아 정책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경제는 많은 것을 잃었으며, 정상적인 복구는 이미 불가능해졌다.


△ 책임감 < 무책임


구로다는 2016년 일본야구에서 최고액인 연봉 6억엔(64억원)을 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가 받는 거액을 두고 시비를 걸지 않는다.

메이저리그에 머물렀으면 훨씬 더 받았을 것이다. 팬들은 그저 '일본야구'에서 다시 뛰어준 데 대해 고마워했다.

그런 구로다는 늘상 엄청난 책임감을 지고 살아왔다. 더 이상 두 자리수 승리를 거둘 수 없게 되면 '선수를 그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선발투수는 9이닝까지 던질 수 있는 몸이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늘상 자신이 받는 혜택 그 이상의 책임을 지려고 했다. 고국팬들의 복귀 요청에 응했던 것 역시 그들의 성원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구로다는 마지막 시즌이 된 2016년 일본프로야구 정규리그에서 151이닝 남짓을 던졌다. 메이저리그에서 선발투수로 200이닝을 던지다가 이젠 더 이상 9회까지 책임을 질 수 없는 체력이 됐다고 판단했다.

나이가 40에 가까워진 뒤부터 구로다는 '더 이상 여력을 남기지 않겠다'는 자세로 매사에 임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2016년 가을 '무책임의 극치'를 보고 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 없이 오로지 개인적 치부와 영달에만 열을 올렸다.

버티고 버티다가 최근에야 여론에 밀려 물러난 민정수석 유병우씨, 정책조정수석 안종범씨, 그리고 박 대통령의 수족 노릇을 해왔다는 이른바 '문고리 3인방', 그리고 최순실 일가 등으로 대표되는 최태민 목사의 자식들이 나라경제를 분탕질했다는 의심이 파다하다.

사실 이들에 대한 위험신호는 많았다. 하지만 정부는 합리적인 의심에 대해선 늘상 '허튼 소리하지 마라'거나 '색깔론'으로 공세를 차단했다. 최순실씨가 국정을 농단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부터 비선실세들의 국정농단에 대한 의심은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간에 흘러다니던 의심들이 점점 진실로 밝혀지고 있다. 권력자는 '합리적인 의심'에 대해 면박을 주는 게 아니라 진정성 있는 조사 등을 통해 의심을 무마시켜야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런 '정상적인'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

정권의 숙주인 여당 의원들의 태도 역시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이명박 정부의 실세였던 정두언씨는 10월 27일 한국일보 와의 통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실상을 거론하면서 2007년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말하모든 사람이 경악할 것이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밥도 못 먹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인터뷰했다.

나도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박근혜 후보를 검증했던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를 국민이 알면 경악할 것"이라는 식으로 발언했던 것이다.

정두언씨는 부인을 여럿 거느리고 온갖 악행을 일삼은 최태민 목사와 박근혜 후보의 관계에 대한 경고 정도만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정두언 씨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하다.

한국사회 위험 인물의 실상을 알고 있는 정치인이라면 국민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두언씨 역시 '자기 편'만 생각할 줄 알았지 국민을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 건을 쥐고 있었기에 퇴임 이후 재직시절 저질렀던 비리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큰 권력이든 작은 권력이든 권력을 쥔 사람들에겐 책임감이 기본이다. 권력을 누리는 대가가 책임감이지만, 한국 사회에선 이런 '상식을 갖춘' 권력자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의 발언도 어이없었다. 그는 10월21일 최순실 씨의 대통령 연설문 개입설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흘 뒤 '개입설'은 '증거자료'를 통해 사실로 확인되고 말았다.

물론 이 실장이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상식인의 시각에선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처가의 부동산을 게임회사가 사도록 떠넘긴 의혹 등 각종 의혹에 시달리는 우병우씨 역시 본연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인사 검증이 핵심인데, 비리 전력을 갖고 있거나 무능한 자들에게 고위직을 넘겼다. 그 자신 역시 대통령 주변인물 관리라는 자신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이렇게 휘둘리고 있는데, 비서진의 최고층 인사가 이를 전혀 눈치도 못 챘다는 것은 사실 보좌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대통령 비서실은 대통령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통령이 옳은 길을 가는데 도움을 주라고 있는 조직이다.

도무지 책임감이란 덕목을 갖춘 인물이 없다. 회계처리를 할 때 돈을 빌려서 뭔가를 사면 차변에 그 자산을 쓰고, 대변에 부채를 기입한다. 세상 일은 복식부기처럼 양면성을 띄고 있다. 권력이라는 자산을 누리는 자는 그 권력의 반대항목인 책임감이라는 국민에 대한 부채를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권력자들에겐 구로다가 몸으로 보여줬던 그 어떤 책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권력자들은 비리를 저지른 뒤 '증거물'을 들이밀기 전까지는 '거짓말'로 일관한다. 결국 거짓 증언을 한 공무원 등에겐 상당한 가중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패널티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 겸손 < 아집


10월24일. 박 대통령이 뜬금없이 개헌안 카드를 던졌다.

이날 박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을 주장하는 국민과 국회의 요구를 국정과제로 받아들이고 개헌을 위한 실무적인 준비를 해나가겠다"고 했다.

임기 초기에 '개헌하자'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했으나 '경제살리기가 우선'이라면 한사코 반대하던 대통령이 느닷없이 이 카드를 끄낸 것이다.

이 때는 대통령 주변인물들의 비리로 정권의 신뢰가 땅에 떨어진 때였다. 이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개헌을 '국면전환용'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국회의원 4년 임기와도 맞지 않고 업무의 연속성도 보장하지 못하는 5년 단임 대통령는 바꿀 필요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렇게 '경제, 경제'를 외치다가 하필 이 때에 그런 제안을 했으니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주변인물 비리를 척결한 뒤 개헌을 하면 될 것이었다.

한데 그날 나는 개헌 제안을 담은 '청와대 보도자료'를 다시 읽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대통령은 경제분야와 관련해 "그동안 국민들께서 힘을 모아주신 결과 의미있는 성과들을 많이 만들어냈다"면서 "대한민국이 창업국가로 변모하고 있으며 우리경제는 역동적인 혁신경제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구조개혁의 성과가 윤곽을 드러내면서 경제기초가 보다 튼튼해지고 있다"면서 "공무원연금 개혁을 시작으로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도입 등 공공개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했다.

그는 "역대 어느 정부보다 내실있는 경제민주화 정책과 적극적인 복지 확대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불균형을 해소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좋은 말만 다 모아 놓은 듯한 '자화자찬'에 실소가 나왔다. 대통령의 진지한 이 발언은 이 정권 권력자들의 지적인 능력, 혹은 도덕성에 대한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이 글을 누가 썼는지 궁금했다. 한국경제는 단기성과에만 집착한 결과 기초가 많이 취약해졌다. 대통령의 아집인지, 대통령에게 원고를 만들어주는 사람의 아집인지 알 수 없으나 이런 평가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구로다는 2014년 메이저리그 양키스의 선발 로테이션을 혼자 지키다시피 하면서 11승을 거둔 뒤 "다음 시즌에 내게 또 다시 계약 제안이 올지 모르겠다"고 겸손해 했다.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함이 걱정이었다. 겸손한 사람은 내가 과대평가 받는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혹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을까를 걱정한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국사회의 권력자들은 상황 파악도 엉뚱하게 하는 데다 겸손함마저 잃어버렸다.


△ 완전범죄에서 배운 것


오래 전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일 할 때 나는 '이 사회에 완전범죄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흔히 '완전범죄는 없다'는 말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완전범죄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을 뿐이다.

사건 담당 기자를 하던 시절 거의 완전범죄가 될 뻔하다가 운이 아주 좋아서(범죄자 입장에선 아주 운이 나빠서) 세상에 드러난 사건들을 여럿 봤다.

이런 일을 접하다 보면 '역시 완전 범죄는 없구나'하고 느끼는 게 아니라 '숨겨진 완전범죄가 대체 얼마나 많은 것일까'하고 경계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완전범죄가 많다는 게 이 사회의 진실이다.

건전한 사회풍토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범죄가 완전범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러면 국가는 점차 위험사회가 돼 간다.

솔직히 말하자. 최근까지 한국사회의 상층부 등에선 정직보다 부도덕이, 미래보다 현재가, 책임보다 무책임이 더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돈을 버는 데도 이런 태도가 더 유리한 경우가 많았다. 권력 상층부로 갈수록 이런 정도가 더 심해졌다.

그리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권력자는 그의 '무능'만으로도 위험한데, 그 권력자가 '부도덕함'(무지에 의한 부도덕 포함)마저 겸비하고 있으면 주변에 어떤 피해를 주는지 우리를 잘 목도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장관급 인사에 대한 인사청문회 제도가 실시될 때만 하더라도 부동산 투기, 논문 조작, 여타 각종 범법행위를 한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어려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다시 사회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난 뒤 '부동산 투기'같은 부도덕한 행위는 고위직이 되기 위한 필수요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국 권력사회에선 이미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 버린지 오래다.

그리고 사적이익을 위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완전범죄들이 있었는지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식으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것같다.

한국이 위험사회에 진입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는 '완전범죄'라면 캐내서 범죄가 완전성을 띄지 못하도록 재구성해야 한다.

늦었지만 상식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풍토가 조금씩이라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훌륭한 야구선수 이전에 훌륭한 인간이었던 구로다가 보여준 태도에서 뭔가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나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taemin.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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