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정리 주옥함 기자 = 중국과 한국은 지리적으로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가까운 나라다. 예로부터 선린우호의 왕래로 인해 한중 간에 바다를 초월한 우정을 쌓아 왔다. 특히 1992년 한중 수교 이래, 양국 관계는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무역액은 약 43배나 늘어났고 인적교류 또한 2014년부터 ‘천만명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로써 한중 우호를 위해 수많은 인사들이 기여를 많이 해 왔다.
2004년 8월 톈진(天津)에서 열린 ‘한국주간’ 우호의 밤 콘서트에서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사진=금교] |
◆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다
내 인생의 황금기에 중국과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30년이 되었다.
“미래 시대는 중국의 것이다. 꼭 중국에 가야 한다.”1988년 갓 결혼 한 우리는 한 지인 교수님의 이런 조언을 받았다. 그 교수님은 오늘 중국의 발전을 예견한 것 같았다. 당시에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는 대만 행 비행기를 탔다.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는 우리가족을 중국 대륙과의 인연을 맺게 해 준 중요한 날이었다. 처음 중국에 발을 내디뎠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치 느리게 가는 시계추마냥 모든 것이 느렸다. 거리의 색상은 온통 회색조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군복 색과 회색으로 통일한 것 같았다. 지금처럼 화려한 색상은 찾아 볼 수가 없었고, 온 세상이 마치 흙색 도시로 보였다. 유일하게 시야에 들어오는 밝은 색은 빨간 시내 버스였다. 그 당시 이 빨간 버스는 두 칸으로 연결돼 정차역이 많아 행진 속도가 느렸다. ‘시간은 금이다’라는 개념은 그때에 무색한 것이었다.
거리는 네온 사인이 없어 저녁 해가 떨어지면 모두 집으로 들어갔다. 현재 저녁 시간을 즐기는 중국 문화와는 많이 달랐다. 오늘날 아파트 공터에마다 주민들이 모여 광창우(广场舞)를 즐겼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 온 중국 문화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꼽으라면 광창우를 꼽을 것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들이 매우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시간이 되면 나도 함께 하고 싶다.
나는 한중 환율 1:100일 때 중국생활을 시작하였으니 이런 중국의 발전과 변화, 중국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 보았다. 지금도 이렇게 발전한 중국을 보면 놀랍고 기적 같았다.그러나 나의 중국 생활은 이런 모습들을 모두 수용하면서 서서히 익숙해져 왔다.
◆어려움 속에 보인 진심
사람들은“중국은 인구가 많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맞는 말이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다. 인구가 많으니 인재도 많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인구가 만들어 낸 결과가 현재의 중국이다.이런 중국의 변화와 발전 속에서 나도 나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기했던 공부를 디시 시작한 것이다.
그 당시 우다코우(武大口)에 있는 지구촌학원에서 언어를 공부한 다음에 나는 중국 대학에 지원했다. 그 때 함께 공부하는 세 명의 중국 친구들이 나에게 많은 도움을 해 주어 나는 공부하는 내내 즐겁고 행복했다.
6월24일, 한중간 대형 호화 여객선 ‘군산펄’호가 산둥성 룽청(榮城)시 스다오신항(石島新港)에서 첫 출항을 했다.[사진=금교] |
그러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겨울에는 석탄 가스가 밖으로 새는 일이 생겨 죽을 뻔했다. 여름에는 청정지역이라 온 다리가 모기의 먹이감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먹는 것도 걱정되었다. 사람들은 매일 빵과 면만 먹었기 때문이다. 산시 지역은 황토지역이라 논이 없고 밭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과 생활하는 동안 밥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시골 출신이라 적응력이 좋았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이 만들어 준 면 음식이 특별히 맛있었기 때문이다. 직접 수확한 밀을 마을 방앗간에서 빻아 음식을 만드니 도시에서 먹었던 면과 달리 맛있었다.
사람들도 너무 다정하고 친절했다. 낯선 외국인이 마을을 돌아다녀도 말을 걸어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환경의 중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어느 듯 마을 사람들이 다 아는 외국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적극적인 인터뷰 덕택으로 나의 박사 논문도 완성되었다. 논문의 제목은 '중국춘절 풍속과 인문정신' 이다. 이미 중국어판으로 출판이 되었다. 이 책 속에 내가 만났던 중국 산시 지역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담겨있다.
◆꿈을 향하는 중국
사람들은 한동안 중국을‘아시아에서 떠오르는 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중국은 아시아가 아니라 세계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는 경제 대국이 되었다. 아마도 이는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듯싶다.
한중 수교 후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 많은 변화를 가져온 중국이다. 오늘날 가면 갈수록 많아지는 자가용으로 예를 들면 매일 도로는 자동차로 몸살을 앓는다. 1가정 2차량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중국이 예전부터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20여 년 전 고속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그 넓은 고속도로에 내가 탄 차량과 한 두 대가 더 있을 정도였다. 지금 보이는 것은 지난 20년 동안 초 스피드 성장을 해 온 결과다.
중국의 이런 기적 같은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발전의 또 다른 예는 까오티에(高铁)가 있다. 우리의 KTX와 같은 초 고속 열차를 부르는 말이다. 평균 시속은 330키로를 달린다. 더욱 믿기지 않은 것 인구가 이리 많은 중국에는 이런 기차 실명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중국은 또 다른 변화를 하고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손안에서 노는 경제, 즉 핸드폰 하나로 초 스피드 결제방식을 도입한 IT강국 중국이다. 오늘날 웨이신과 즈푸바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이 쓰는 전자 결제방식이다.거리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도 웨이신이나 즈푸바오 바코드를 목에 걸고 다닌다.
이런 변화로 시장의 형태도 많이 달라지고 새로운 상품의 시장 진입과 전파력도 많이 빨라졌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도 이런 중국의 너무 빠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숨가쁠 정도다.하지만 중국은 20여 년 동안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관광지 공왕부(恭王府) 앞의 필자. [사진=금교] |
그 동안 중국에서 살아온 경험을 통해 나는 중국이 굉장한 경쟁력을 가졌다는 점을 깨달았다. 바로 중국은 필요함을 느끼면 빨리 실행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인구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을 성공시킨 셈이다. 이 모든 것이 놀랍고 기적 같은 일이다.
한중 관계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오늘날까지 걸어왔지만 또한 놀라운 성과도 많이 거뒀다. 그리고 작은 바람이 있다면 한중 중한 양국이 지금보다 더 윈윈하는 양국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임선우 전 허베이(河北) 경제무역대학교 한국어 강사
[금교(金橋, 중국 국무원 신문판공실 주관 잡지)=본사 특약]